새는 쪽박 나가도 샌다(「파라슈트키드」의 낮과 밤: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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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원 쓰고 배우는건 「좌절」/함정 득실… 박군처럼 안되면 다행
매년 1만명 가까운 국내의 젊은이들이 해외유학을 떠난다. 국제화·개방화의 한 물결이다. 그러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 유학은 긍정적인 면과 함께 이번 박한상군 사건에서 보듯 심각한 역기능도 없지 않다. 낙하산을 타고 적지에 투입되듯 부모와 떨어져 이국에 버려진 이들 「파라슈트키드」의 문제는 현지에서도 관심사가 되고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15일부터 본사 기자 6명과 각국 주재 해외특파원 등 13명으로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유럽·필리핀·러시아·중국·일본 등 세계전역 유학실태에 대한 집중취재를 벌였다.
『무지개였어요…. 황금보다 귀한 세월만 날려버린거지요.』
4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20일 LA공항을 통해 귀국길에 오른 이모군(25·서울 창천동).
『나와 같은 실패가 조금이라도 줄기 바란다』며 털어놓은 그의 유학여정은 평범하면서도 뚜렷한 의지가 없었던 그에겐 축 늘어진 어깨만큼이나 버거운 것이었다.
이군이 유학을 결심한 것은 D대 지방캠퍼스 1학년에 다니던 89년 7월께. 서울 K고를 중간에서 약간 웃도는 성적으로 졸업한후 진학은 했으나 대학·학과 모두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미국 UCLA대에 유학중 방학을 맞아 귀국한 선배로부터 솔깃한 말을 듣게 됐다.
『집안도 넉넉한 편인데 도전해보라. 미국의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Comunity College·우리의 전문대와 비슷)는 들어가기도 쉽고,졸업한뒤 4년제 대학에 어렵잖게 편입할 수 있다.』
쾌히 부모 승낙을 받은 이군은 1학년을 얼렁뚱땅 마친뒤 수속을 밟아 90년 9월 선배가 다녔다는 LA지역 한 커뮤니티 칼리지의 어학연수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모든게 혼자 뛰어넘어야 할 높은 벽에 둘러쳐져 있었다.
여느 한국학생처럼 영어가 약했던 그는 어학연수 1년을 포함,고생고생끝에 3년만에 칼리지를 마쳤다.
지난해 9월(미국의 새학기 시작 시기) 교양과목 몇개 학점만을 인정받아 비교적 괜찮다는 LA 모사립대 3학기에 겨우 편입했다. 그것도 한 학기 8학점의 어학코스 재수강 조건으로.
『훨씬 더 큰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선 달리는 언어때문에 미국학생들보다 두배이상 공부해야 하는건 당연했지요.』
허구한 날 리포트 작성이니,원서 독해니 하는 극히 기본적인 공부에 온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러고도 잘해야 6∼7년씩 걸려 간신히 대학을 마치는 주위 사례를 보면서 점점 자신을 잃게 됐다.
마치 감옥같은 아파트에 혼자 살며 외로움과 막막함·고달픔에 젖어 이미 처음의 각오는 다 쇠진됐고 칼리지 시절부터 이따금씩 빠지기 시작한 유흥과 「농땡이」는 어쩔 수 없이 늘어만 갔다.
「그 좋다는」 마약의 유혹도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망해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지만 아무리 이를 악물고 머리를 쥐어짜도 헤쳐나갈 방도가 없었어요.』
2학기에도 1학기때 펑크낸 어학코스 2학점을 더 들어야할 처지가 된 그는 지난 1월 겨울방학때 잠시 귀국,입대절차를 마쳤다.
「그래도 더 타락하기전에 포기한게 다행」이라며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엔 장미빛 꿈으로 덤벼든 해외유학의 허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해외유학­.
80년대말께부터 해마다 6천∼1만명의 우리 청소년들이 두드리고 있는 「미지의 문」.
그러나 막상 열고 들어가보면 새로운 세계의 신선함보다는 온몸으로 부딪쳐야 할 함정과 장애물이 즐비하게 도사려 있는 살벌한 전장이다.
『아무도 도와주지도,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거친 황무지같은 곳입니다. 그나마 첫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단 한번의기회만이 주어져있는 곳이죠.』 미국유학생 출신으로 유학관련 출판사인 미주어학사 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양진영씨(37)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내에서 이루지 못했거나 이룰 가망이 적은 것을 유학으로 얻으려 하지만 성과를 거두는 일은 거의 없다』며 『본인이건 부모건 유학을 가면 뭔가 될 것이라 믿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라고 충고한다.
주위의 성공사례만 믿고 충분한 준비·능력도 갖추지 못한채 무작정 덤벼들거나 그저 외국어능력이나 해외견문만이라도 쌓아보겠다고 나선 젊은이들.
그들에겐 인생의 황금기인 세월과 그에 소요되는 경비·노력 등의 낭비는 고사하고 탈선·타락의 유혹이 너무도 많은게 취재팀이 돌아본 유학현장이다.
인생이고 가정이고 조국이고 다 팽개쳐버린 듯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확고한 목표와 의지가 없다는 것,그리고 불필요하리만큼 용돈이 많으며 부모의 보호와 관심이 단절돼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이같은 상황을 미국 현지언론은 최근 「파라슈트키드(Parachutekid)」라는 제목으로 기획보도했다. 낙하산에 태워 적지에 투입하듯 해외에 내던져진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미국 언론보도는 이웃 대만 청소년·부모의 사례를 소개한 것이지만 우리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미국 샌디에이고지역에서 3년째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고 있는 한인 목사 김순렬씨(38)가 소개한 사례를 보면 실감이 난다.
고교 2년때 그곳에 유학와 92년 9월부터 지역의 한 대학에 다니던 C모군(24)이 두달전 자살을 기도했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온 C군은 지나친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세를 보여왔으며 급기야 두통약·수면제를 잔뜩 삼킨뒤 혼수상태에서 김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황급히 달려가 병원으로 옮겨 다행히 생명을 건졌지만 이후 「내가 남자인지,여자인지 모르겠다」는 등 횡설수설하더군요.』
『나중에 알아봤더니 유학온 4년내내 부모가 한번도 방문을 안했더군요. 자살기도 직후 부모에게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한국에서 멀쩡하던 애가 왜…」라며 오히려 반문했어요.』
소식을 듣고도 끝내 그의 부모는 오지 않았고 병세가 호전된 5월초 C군은 소리없이 혼자 귀국했다.
『아무 통제없는 거친 들판같은 곳인데…』 김 목사의 말이다. 공부라는 명분으로 「내던져진」 우리 아이들의 방황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김석현기자>
□특별취재반
▲미국·캐나다=김용일(특파원)·김석현(사회1부)·조용철(사진부) ·이석우(국제부)기자
▲일본=채흥모차장(사진부)·오영환특파원
▲유럽=유재식(독일특파원)·고대훈(프랑스특파원)·남정호(EU특파 원)기자
▲러시아=김석환특파원
▲중국=문일환특파원
▲필리핀=김영섭기자(사회1부)
▲호주·뉴질랜드=권영민기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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