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세계바둑오픈' 채무자로 전락한 셰허의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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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제8회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제1국
[제7보 (113~126)]
白.朴永訓 5단 黑.謝 赫 5단

엷어지면 채무자가 된다. 고수들이 당장은 실리가 부족하더라도 두터움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빚 독촉에 시달리기 싫어서다. 셰허가 113, 115로 둔 것은 아직은 내가 빚을 독촉하는 입장이란 것을 강조한 뜻이 있다. 이 수는 A의 파고들기와 함께 B의 절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박영훈5단이 이걸 외면하고 116으로 날아들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흑▲ 3점의 목숨이 당장 급해진 것이다. 흑은 시종 두터웠고 공격권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전보에서 몇 합이 오고가는 동안 상황은 크게 변해 있었다. 셰허는 115를 둘 때 세상이 바뀐 것을 몰랐던 것일까.

117로 달아나자 118로 쫓는다. 118이 C의 돌파를 보고 있어 셰허는 부득이 121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순간 124가 다가오자 셰허는 명치를 찔린 사람처럼 숨이 막혀온다.

"흑이 무너지고 있다. 수습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유창혁9단)

셰허가 혼신의 힘을 다해 125로 벗어나려 하자 박영훈은 126으로 가볍게 젖힌다. 전부는 필요없다. 조금만 내놔라 하는 의미다. 중앙이야 살아갈 수 있지만 '참고도' 백1로 뚫고 들어가는 수도 큰 문제다.

흑4로 버티는 수가 될 듯도 싶지만 백9의 맥점이 있어 이런 식은 안 된다. 그렇다면 백이 뚫고 들어올 때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저러나 바둑이 언제 이렇 엷어졌단 말인가. 셰허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내젓는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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