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일과 「5·18」(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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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불타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평소 그를 미워하던 한 파라문(인도의 귀족)이 찾아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동족 가운데 한사람이 불타에 귀의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듣기만 하던 불타가 『집에 손님이 찾아와 음식을 대접했을 때 손님이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고 조용히 물었다. 파라문이 『그야 물론 주인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고 대답하자 불타는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분노하는 사람에게 맞서서 분노하면 마땅히 분노는 두배가 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분노하지 않으면 분노는 절반으로 줄어들 뿐만 아니라 두개의 승리를 얻는 셈이 된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며 동시에 분노하는 쪽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란 오로지 분노하는 사람의 것일 따름이다.』이 말을 듣고 그 파라문도 불가에 귀의해 아라한(성자)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불타가 가르치는 자비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다. 그러나 범인으로서는 그 가르침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 상대방이 분노하면 자신은 그보다 두배 이상 분노하게 되고,상대방의 분노는 다시 두배이상으로 부풀려진다. 잘못에 대한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점점 커지고,용서하게 되면 점점 작아지게 마련이다.
80년 광주의 5·18민주항쟁 직후 사소한 필화사건에 얽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한 시인은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설혹 하늘이 용서한다해도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하늘이 용서하는 일을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마는 그가 가슴속에 품었던 응어리진 한의 크기와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5·18 당시 군인들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던 광주시민들과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용서받느냐,받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쪽에 달려있다. 진정 용서를 받기 원한다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을 마음속 깊이 위로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그때의 일에 대한 그네들의 생각,그리고 그들에 대한 용서의 크기는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궁금하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과 겹쳐진 5·18 14돌을 맞으면서 새삼 용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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