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大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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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건 대구였다. 한국전쟁 때다. 북한군의 파죽지세는 대구의 힘 앞에서 멈췄다. 군사작전권은 유엔군이 쥐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유엔군 지도부에 항전의 혼을 불어넣은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그중 한명이 당시 내무부 장관인 조병옥이었다.

북한군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0년 9월 10일께. 대구의 관문인 영천에선 개전 이래 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勢)불리를 느낀 미8군의 워커 사령관은 국방부와 내무부의 부산 철수를 명령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 놨다. 조병옥은 워커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조병옥="경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면 전선의 경찰과 국민의 전의가 떨어져 대구는 함락된다. 대구가 함락되면 부산도 견뎌낼 수 없다. 나는 철수 못한다."(그땐 경찰도 전투에 참여했다)

▶워커="내 관사와 미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려 했는데…. 당신의 결의를 듣고 재고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도 당신처럼 내 사령관실에다 침대를 놓고 작전을 지휘하겠다."

조병옥은 워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최소한 시간벌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다음날 박격포탄이 쏟아지는 영천 3백 고지를 찾아 이영일 8사단장을 격려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영천 전투는 조병옥이 위문방문한 그날 밤 국군에 의해 완전히 평정됐다. 대구 방어전선이 안정을 찾자마자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한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닷새 만에 벌어진 이 일을 조병옥은 '기적'이라고 회상했다.

조병옥이 대구를 사수하고, 대구가 조국을 구했다는 얘기는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조병옥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서울이 지역구였던 조병옥은 정치깡패들에게 쇠뭉치 습격을 받았고, 철창 신세를 졌다. 해방된 조국의 모습이 겨우 이런 거냐는 자포자기에 아예 정계를 떠나려 했다. 그런 그를 구한 건 대구였다. 1954년 총선에서 대구는 그의 출마를 요청했다. 75%의 몰표로 조병옥을 50년대의 독보적인 야당 지도자로 키웠다.

50년이 지나 조병옥의 아들 조순형이 서울 지역구를 대구로 옮긴다고 한다. 대구시민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