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작가가 본 그의 미술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이번 顧菴선생의 회고전은 한국화단에 큰 활력소가 될 것 같다. 국제적으로는 큰 예술가로서 대접받았으나 모국으로부터는 철저하게 배척받고 이역의 땅에서 고독한 생을 마쳐야 했던 불운한 예술가. 늦기는 했지만 이번 전시회가 그의 고혼을 위해 모국이베푸는 대접의 일단이 되는듯 싶어 반갑다 아니할 수 없다.
고암선생은 한국미술계로서는 여명의 시대인 1950년대에 적지않은 나이로 파리화단에 뛰어들었다.그 용기도 대단하거니와 가자마자 과거사를 미련없이 송두리째 털어버렸다.1960년의 콜라주작업들을 보면 그런 비장한 결의가 확연하다.그야말 로 사생결단하고 비형상성의 세계로 돌진했던 것이다.추호의 주저함도 없는 그 화면속에서 무서운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솔직히 말해 나는 충격을 받았다.阮堂 이후 꼽아야 할 한사람이 아닌가. 고암과 완당은 비록 1백년이라는 시차는 있지만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동향인 점이 그렇거니와 완당은 모슬포 유배지에서『歲寒圖』를 만들었고 고암은 파리란 유배지에서 文字抽象圖를 만들었다.
고암 예술정신의 치열함 밑바탕에는 한국의 토속성 짙은 아취가있다.그것은 특히 조각적 형태속에서 쉽게 알아 볼 수 있다.소박한 시골의 인정미와 따스함이 그것이다.탈을 만들고 두들겨 릴리프를 만들고 나무를 깎을 때는 꼭 조선시대 목 기 다루듯 했다. 서구미술이 이성적이라면 고암의 경우는 내면성의 세계를 지향한 것 같다.뜻 그림 즉 寫意精神이 아닐까 싶다.그런 맥락에서 보면 만년을 群像圖로 매듭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도할 수 있다.
고국의 민중항쟁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피가 끓어올랐다.질주하며 소용돌이치는 군상도를 축소해보면 60년대 콜라주시대의 리듬이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群像圖는 전생애의 압축이랄 수도 있고 전생애로부터의 탈출이랄 수도 있다.그것은 유럽으로부터의 초연이며 수묵에로의 歸依다.어쨌거나 고암은 승리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