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의 프린스' 아베 초라한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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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26일 화려하게 일본 총리에 등극했던 '정가의 프린스'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재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임을 발표했다. 기자회견 때 그의 눈은 충혈돼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 아베 총리는 회견 전 측근에게 "이제 기력과 자신감 모두 사라졌다"고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정권 운영 더 이상 불가능"=아베 총리는 이날 사퇴의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먼저 본인이 집착하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관철하기 위해선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현재 야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참의원에서는 부결될 것이 뻔한 상황이다. 따라서 총리 교체를 통해 여론 변화를 모색한 뒤 법안 통과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설명이다.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미.일 안보조약 개정과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처럼 아베 총리도 테러법과 동반자살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둘째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대표가 자신이 제의한 당수 회담을 거부해 사임을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국 운영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아베 총리가 밝힌 두 가지 이유가 모두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건강 이상설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는 사임 의지를 10일 아소 다로(生太郞) 간사장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에서 소신표명을 통해 "앞으로도 개혁작업을 진두지휘해 나가겠다"고 목청을 높인 그날이다.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 관방장관은 이날 "총리가 회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난달 말 동남아 순방 직후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다"며 "이것이 (사임의) 한 원인"이라고 털어놨다. 최근에는 줄곧 링거주사를 맞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 전자상가의 한 상인이 12일 TV로 중계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임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 참패와 각료의 정치자금 스캔들 등 악재가 겹쳐 취임 1년도 안 돼 물러나게 됐다. [도쿄 AFP=연합뉴스]

아베 총리 집안은 본래 건강이 안 좋은 편이다. 조부인 아베 간은 탈장으로 고생했고,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은 췌장암으로 67세에 사망했다. 아베 본인도 1998년 조부와 마찬가지로 탈장 증세로 6개월간 장기입원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눈물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증상이 목격되곤 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퇴진의 이유를 건강문제로 몰고 가 동정을 사려는 전술"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임기 내내 스캔들에 시달려=취임 직후 한국과 중국을 전격 방문해 고이즈미 정권과의 차별화에 성공한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한때 65%까지 올랐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바로 각료들의 잇따른 스캔들과 정치자금 문제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20%대까지 추락했다. 7월 29일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후 아베 정권은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져들었다.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법 제정, 애국심 교육을 강화하는 교육기본법 개정 등 보수 색채가 강한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결국 일본 국민은 이를 외면했다. 이 카드, 저 카드가 다 먹히지 않자 결국 사임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내각제와 총리 사임=내각제인 일본은 양원제를 택하고 있는데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뉜다. 중의원이 하원,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한다. 헌법상으로는 야당이 참의원 다수 의석을 차지해도 여당이 국정 운영을 계속할 순 있다. 중의원이 참의원에서 부결한 법안을 재의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원제 취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재의결은 헌정 사상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아베 정부는 참의원 선거 패배 후 이미 '뇌사 상태'란 평가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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