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네 선택에 보상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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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80년 봄, 우린 대학생이 되었다. 꿈 많은 청춘이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카니발, ‘그땐 그랬지’)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아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게 우리의 희망을 밟았다. ‘서울의 봄’은 오기도 전에 스러져 버렸고, 멀리 광주에선 별별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신문은 기사가 삭제된 채 누런 종이 상태로 배달되었다. ‘선진 조국’을 창조하자고 대통령은 소리 질렀지만, 우리가 ‘후진 조국’에 살고 있음을 각인시킨 거나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휴학에 들어갔다. 밤 12시면 통행이 금지되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강창민, ‘비가 내리는 마을’). 온통 절망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넌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만나자.” 선배들은 ‘녹화사업’에 끌려가고 후배들은 분신을 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넌 너의 길을 갔다. 시위 주동과 제적, 구속, 3년의 실형 선고, 위장취업, 적발과 또 구속,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운동권의 정형화된 길. 그럼으로써 너는 운동권 386 세대의 맏형이 되었다. 면회를 갔었을 때, 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선택한 길이야.”

 난 진학을 택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악악 대한민국, 악악 나의 조국”(정수라, ‘아! 대한민국’)이라는 주술(呪術)이 빗발치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시위로도 바뀔 수 있겠지만, 학문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네가 꿈꾼 것이 혁명이라면 진화는 나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10여 년 전, 우린 만났다. 면회 갔었을 때 공연히 미안하고 부끄러웠었다고 하니, 넌 답했다. “뭐하러? 어차피 각자의 길이 있는 건데.” 행정고시에 합격한 E, 이제야 부장이 된 K, 여러 친구의 근황이 입에 올랐다. 그러나 채우기가 바쁘게 소주잔이 비어 가다가, 넌 뜻밖의 말을 했다. “다들 잘 살고 있구나. 근데 조국에 바친 내 청춘은 누가 보상해 주지?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취중실언이 아니라 취중진담이었다. 그 후 이어진 네 말은 “너희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준비할 때 나는 민족의 이익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그러니 이젠 내가 개인적 이익을 취해도, 설령 탐욕스럽게 취해도 너희들은 할 말 없는 것이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자던 너의 그 말을 난 지금껏 믿었다. 비록 우리 서로의 길은 다르지만, 그 길은 모두 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작은 냇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결국 하나로 만나 민주의 바다, 자유의 바다, 번영의 바다를 만드는 데 저마다 이바지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스, 스, 로.

 그날, 난 네게 부끄러웠던 내가 부끄러웠다. 하긴 진작 그랬어야 할 일이다. 본래 우월한 인생이란 없는 법이고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을 선택한 것인데, 어떤 길이 어떤 길에 부끄러울 일이 뭐 있으랴. 문제는 열심히 살았느냐지 어떤 명분으로 살았느냐는 아닐 것이다. 삶의 방식의 차이지 네 조국은 우리에게도 조국이었다.

 지금은 어딘가 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들었다. 그날, 배신 운운하며 넌 주변을 욕했지만, 정작 배신한 것은 너였다. 아직도 바라는 것 없이 묵묵히 그 길을 가는 네 동료들을 너는 버렸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힘들게 제 인생길을 가는 친구들을 너는 쉽게 잊었다. 네가 선택한 인생에 보상을 달라고?

 잘 지내라, S. 그래도 최소한 법은 지키면서. 네가 사리를 좇아 살았다고 비난했던 사람들도 법은 지키며 산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