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들을 위로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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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7면

김경한 변호사·전 서울고검장

꼭 일주일 전 인천공항으로 돌아온 탈레반 피랍자들은 여지없이 주눅 들어 있었다. 40여 일간의 고초와 그 후유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 풀려난 이후 더욱 세차게 쏟아지는 비난 여론의 무게가 그들을 짓눌렀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비난은 두 갈래다. 하나는 교회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를 향한 것이다. 먼저 한국교회의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해외 선교활동이 집중 포화를 맞았다. 정부의 강력한 경고를 무릅쓰고 위험국가에 갔다가 변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국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고 적지 않은 혈세까지 축내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은 익명성 뒤에 숨어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쏟아냈다. 이번 사태의 제1차적 책임은 분명 교회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의 특성을 조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믿음과 교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그 밖의 모든 세상사는 여기에 종속시킨다. 역사에서 보듯 때로는 목숨까지도 주저없이 내던진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다. 그들의 행동을 모험주의 또는 실적주의라고 한마디로 매도해버릴 수 없는 이유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내가 나의 종교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종교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탈레반이라 하여 다르지 않다. 그들은 악명 높은 테러집단이지만 이슬람 신앙을 생명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다. 선교활동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을 제외한 다른 종교는 모두 ‘마귀’의 무리라고 공언하고, 이교도 한 명을 개종시키는 것은 일반인 열 명을 입교시키는 것과 맞먹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설법을 하였다는 인도 사르나트의 녹야원에까지 몰려가서 찬송가를 불러대는 극성 한국인들도 있다. 이처럼 독선적이고 정복주의적인 선교방식은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번 사태에 임하는 정부의 대응자세가 뭇매를 맞았고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테러집단과 직접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관례를 정부가 깨뜨렸다, 한국군 철수 등 협상카드를 너무 일찍 빼들었고 그들의 요구에 너무 많이 굴복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인이 납치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등등의 비판이다. 거액의 금전 거래설은 확인할 길 없는데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 정보기관의 총수가 현지에서 언론에 노출되고, 나아가 그의 활동을 무용담처럼 홍보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연출되었다.

이런 비판과 지적은 모두 일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우리가 정부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역(異域)의 험난한 산악지대에 20여 명의 국민이 납치되어 있다. 그중 두 명의 인질이 차례로 무참히 살해되어 길섶에 버려지고 나머지에 대해서도 추가적 살해를 공언하는 상황이다. 몇몇 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고개를 흔든다. 마치 외딴집에 살인강도가 든 것처럼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사람의 생명은 비길 데 없이 소중한 것이고, 위험에 처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은 정부의 원초적 임무다. 이번에 우물쭈물하다가 더 많은 희생자가 났더라면 정부의 무능에 대한 비난은 지금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황망(慌忙) 중에 정부의 대처방법에 다소의 무리가 있었고 국력도 적지 않게 소모됐지만 그래도 19명의 귀중한 생명을 건졌다. 이 점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다. 지금 당장은 사지에서 돌아온 그들을 반기고 위로하자. 이번 일과 관련된 갖가지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모두가 냉정을 되찾은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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