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지 않은 시선 그것을 몸으로 그려 냈다 붓은 정교해서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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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옛 탄광마을의 스산한 겨울 풍경을 담은 ‘시험공부’( 78 x 117㎝, 캔버스에 아크릴, 2005). 노랗게 불켜진 창 안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이 앉아있었을까.

“나는 붓이 싫다. 붓은 정교하게 구획하기 때문이다. 내 그림은 몸으로 비벼낸 자취다.”

 화가 오치균(51·사진)은 손가락으로 물감을 섞고 찍어서 화면에 투덕투덕 바른다. 그의 그림은 독특하다. 색상은 검은 색이거나 청동색 계열로 칙칙하다. 그리는 대상은 퇴락한 탄광 마을의 집들이나 누추한 골목이다. 그 곳의 한 단면을 뚝 잘라서 보여준다. 직접적인 형태가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가까이서 보면 수없이 덧바른 물감 자국만 있을 뿐이다.

 형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비로소 드러난다. 흐릿하던 형태들이 점차 뚜렷한 현장감과 존재감을 가지고 화면에서 일어선다. 현장감은 그림의 시선에서 온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대상을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시각과 구도다. 존재감은 물감을 중첩함으로써 형태를 연상케하는 기법에서 온다. 그 이미지는 막바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뇌가 색상과 색상의 차이와 겹침을 구조적으로 파악한 뒤 조합하는 이미지다. 마치 착시현상처럼. 그렇게 그린 풍경화는 처연하면서도 탐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오치균의 개인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제목은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 작품은 40점이 나왔다. 9·11사태 이전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내려다 본 뉴욕 시리즈(1993~95)를 빼면 모두 2004년 이후의 신작이다. 그는 2002년 까맣게 탄 색으로 표현한 사북 시리즈를 발표해 매니아 층을 확보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모두 비매품이라고 화랑측은 밝혔다. “내년에 해외 전시가 있어서 작품을 잡아두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지금의 내 자신, 다양한 작품을 벌거벗은 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강원도 사북의 폐광촌을 그린 이유를 물었다.

 “왜 사북이냐고요? 여행길에서 그냥 맞닥뜨렸습니다. 온통 까만 마을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외롭게 켜진 알전구, 노란 해바라기, 녹슨 양철지붕에 눈처럼 쌓인 탄가루…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등줄기가 오싹해 정신없이 그렸지요.”

 과거 사북의 쟁의사태는 전혀 몰랐단다. “만약 알고 그렸다면 ‘스토리텔링’이 됐겠죠. 나는 색감과 질감으로 이야기할 뿐, 그림에 메시지를 넣지 않습니다. 다만 대상이 나를 충동질해서 그릴 뿐이지요.”

 이번엔 진달래 그림이 15점쯤 나왔다. “진달래는 따로따로 툭툭 피어있어요. 서민스러웠습니다. 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졌지요. 아름다움은 일회성입니다. 느낌이 오면 막바로 그려야합니다. 그날이 아니면 안되는거지요. 나는 지겹도록 많은 그림을 그려왔어요. 그날 그날의 성취감이 없으면 예술가로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의 가슴과 등, 양 어깨에는 5개의 나비 문신이 있다. “영화 ‘빠삐용’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지요. 1999년에 시작해서 한마리씩 문신을 늘려나갔어요. 나비는 변태를 하니까 좋아요.” 전시는 26일까지. 관람료 무료. 02-734-6111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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