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41. 두 사람의 진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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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78년 필자를 찾아와 귀국을 제안했던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

나는 미국 UCLA와 UC샌디에고 시절 한국 사람 두 명이 나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1975년,또 한 사람은 1978년으로 시차는 다르지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75년이었다. UCLA의 내 연구실 비서가 누가 찾아 왔다고 인터폰을 했다. 나는 대형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비가 충분해 비서를 쓸 수 있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은 한국 정부가 보낸 ‘요인’이었다. 지면에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그는 내게 정중하게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위해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집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최상급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조건도 소개했다.

나는 “여기서 할 일이 너무 많고 지금도 바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한국으로 들어가기 어렵겠습니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그는 몇 번이나 간청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나는 핵 검출 전문가였다. 나중에 어렴풋이 짐작해본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 개발 구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내가 점 찍혔던 듯하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당시 나는 PET 개발을 완료하고 후속 연구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지명도도 상한가를 치고 있던 중이었다. UCLA 안에서도 그때까지는 휴스 교수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그런 좋은 연구 환경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때 내가 귀국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꽤나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사람은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이용태 박사였다. 그는 78년 UC샌디에고로 찾아왔다. 초면이었다. 후일 그는 삼보컴퓨터㈜를 일으켰으며, 한국 정보산업의 대부가 됐다. 그 역시 “한국에 들어와 일해 볼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첨단 과학을 키우기 위해 해외 과학자를 유치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 정부 요인이 왔었던 75년처럼 잘 나가던 시절과는 달리 고국 생각이 자주 나던 때였다.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서 간 곳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아닌 한국과학원(지금의 KAIST 전신) 이었다. 당시 한국과학원장이었던 조순탁 박사를 만난 게 계기였다. 조 원장은 50년 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원로 과학자였다.

“조 교수,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연구해도 좋으니 과학원으로 오면 어떨까?”

미국 교수직을 접지 않아도 되니까 편할 때 와서 연구하라는 조건이었다. 조 원장은 연구력 있는 대학 교수가 귀한 줄도 알고, 연구 능력이 있으면 매일 학교에 붙들어 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미국 시스템이었다. 나도 귀가 솔깃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거의 같은 시점에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인 컬럼비아대학에서 정교수 자리를 줄 테니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컬럼비아대학과 한국과학원 교수 겸직이라는 나의 연구 인생에 또 한번의 황금기는 이렇게 열리기 시작했다. 이용태 박사의 제의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절반의 귀국’은 훨씬 뒤에 시작됐을지 모른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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