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거주 백인들 천덕꾸러기 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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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피부가 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백인들이 으스대며 폼잡던 시대는 지났다.
과거 아시아국가들의 소득수준이 낮아 먹고 살기가 힘들때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들은 통상 고급주택에 기사가 딸린 고급승용차를 모는 특권계급이었다.그러나 최근 아시아국가들의 소득수준이높아지고 거꾸로 유럽국가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되자 처지가 뒤바뀌게 된 것이다.
과거 동아시아에 거주하던 백인들은 대개 건축가.은행원.디자이너.변호사등 고소득을 보장하는 직업에 종사했으나 이제는 이른바「3D 업종」도 마다하지 않는다.호치민시 피자가게의 종업원,東京 나이트클럽의 문지기,홍콩 음식점의 보이가 이젠 백인들이다.
유럽경제가 장기간 침체국면을 헤매고 있는 반면 이 지역의 경제는 매년 고도의 성장을 구가함에 따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유럽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영국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大 출신 영국 인 2명을 고용하고 있는홍콩의 한 중국인 환투기꾼은『그들은 젊고 배가 고파 임금이 싸다』고 이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동아시아 거주 백인들의 처지가 이렇게 바뀌면서 이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도 나빠지고 있다.일부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면도 있지만 백인들은 지독한 개인주의,도덕적 타락등으로 천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예컨대 태국에서 백인들은 으레 마약중개업자나 변태성욕자쯤으로여겨지고 있다.실제로 최근 독일인 2명이 약 4㎏의 헤로인을 밀수하려다 적발됐고,네덜란드인 한명도 헤로인 7㎏을 밀수하려다적발됐다.이에 앞서 영국인 1명도 같은 혐의로 체포됐는데 최악의 경우 모두 사형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
홍콩에서는 이들을「filth」(오물)라고 빈정대고 있다.「Failed in London,try Hongkong」(런던에서실패하고 홍콩에서 시도한다)의 약자라는 것이다.백인들이 이처럼천덕꾸러기가 되면서 이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용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싱가포르에서 자동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다 지난 3월초 체포된 미국인 학생 마이클 피터 페이군(18)의 경우다.그는 장난삼아 한 낙서의 대가로 4개월 징역형과 2천2백30달러의 벌금,그리고 6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한대만 맞으면 누구라도 기절하고 만다는 이 태형에 대해미국측은 너무 가혹하다며 항의했다.그러나 이에 대해 싱가포르측은『백인들의 피부는 아시아인보다 얇으냐』며 일축했다.
[베를린=劉載植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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