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식어가는 부시·블레어 '밀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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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라크 핵무기와 관련된 정보조작설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밀월관계가 식어가고 있다. 지난해 7월 대량살상무기(WMD) 사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자살사건에 관한 청문회 내용을 담은 허튼 보고서가 28일 공개될 예정이다. 켈리는 지난해 5월 "영국 정부가 이라크 WMD의 위협을 과장.조작했다"는 BBC 보도의 취재원이었던 과학자다.

당시 블레어 총리는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라크가 보유한 WMD의 위협을 과장했다는 여론이 끓어오르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BBC 방송의 취재원이 켈리 박사라는 사실을 공개할 것을 지시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급기야 블레어 총리는 지난 7일 의회에서 "켈리 박사의 자살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면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필요에 의해 서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진정한 사랑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필요할 때만 블레어를 이용하는 부시 입장에서는 일시적인 '바람'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아무튼 이제 부시의 마음은 변했다.

하지만 블레어의 사정은 다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블레어의 모든 정책은 부시 행정부의 그것과 일치했다. 블레어는 이 같은 자신의 정책을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앞세워 정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미.영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블레어의 정치적 언행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 블레어를 압박하고 있는 문제는 이라크에 WMD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온 부시 행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이다. 연초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블레어 총리는 영국군 병사들에게 "이라크 내 WMD를 수색하고 있는 미군들이 틀림없이 이들 무기의 존재를 증명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대해 폴 브레머 미 군정 최고행정관은 "확인되지 않은 근거 없는 발언"이라고 말했다.

미.영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미 행정부가 단 한번도 블레어 정부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 행정부의 정책은 언제나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움직였으며, 국외의 사소한 문제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영국 정부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블레어 총리는 이라크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자국민들에 대한 게릴라 공격 등 치안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지난달 이라크에서 발생한 저항세력들의 대규모 공격은 이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안일함을 드러냈다. 몇몇 영국군 소식통들은 "미국인들이 이라크에서 영국군의 존재를 잊어버리려는 것 같다"면서 "이라크 저항세력들의 움직임에 관한 미군 측 정보가 충분히 영국 측에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양국 관계의 큰 변화는 이들 두 나라의 입장이 '다르다'에서 '상반된다'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는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 유럽 내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 영국에 불리한 정책들을 구사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은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독일과 프랑스를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미국의 발표가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독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믿고 있다. 미국의 한 우익 잡지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영국을 이용해 유럽연합(EU) 통합 이후 거대한 정치.경제집단으로 등장한 EU를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정책 입안에 반영했다.

최근 유럽의 안보정책은 더 없이 나약하다. 그리고 EU 국가들은 그 책임을 블레어 총리에게 돌리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륙'이 아닌 '미국'을 선택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유럽의 위기를 무시하면서까지 네오콘을 선택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