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러시아의 도발과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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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북극해 쟁탈전은 러시아의 독단적인 외교 정책이 초래한 갈등의 한 예일 뿐이다. 러시아 최대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은 벨로루시가 가격 인상분을 안 냈다며 가스 공급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위협했다. 지난해 1월에는 가격 협상 결렬을 빌미로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가 소련 시대의 기념물 철거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의 은행·언론사 웹사이트에 사이버 테러를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 그루지야는 지난달 7일 러시아가 영공을 침범해 미사일을 투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는 부인했지만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다.

러시아는 서방 국가와도 각종 문제로 분쟁 중이다.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인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살해 용의자를 송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영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대사를 추방하자 러시아는 영국 외교관 추방으로 맞대응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는 더 많다. 미국이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을 지원한다고 믿는 러시아는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장 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미국 주도의 코소보 독립 유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 이를 좌절시켰다.

크렘린은 앞으로도 미국과 유럽의 대외 정책을 방해하고, 이를 비판하는 서방 국가를 조소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런 행동이 서방 국가와의 맞대결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 러시아는 중산층의 성장과 더불어 매력적인 시장으로 떠올랐고, 이를 이용해 외국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크렘린이 ‘전략적 부문’에 보호정책을 펴겠지만 시장 개방의 이득을 취하려는 러시아가 이란· 베네수엘라처럼 국제사회 무법자의 길을 택할 리는 없다.

둘째,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국제사회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지만 남미와 아프리카·남아시아 등에 미치는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미미하다. 경제 규모도 멕시코를 약간 넘어선 수준이며,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셋째, 소련과 달리 오늘날 러시아에는 다른 국가를 선도할 수 있는 이념과 사상이 없다. 사회주의 선봉에 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게도 러시아는 특별한 의미가 아니다.

사실상 러시아 외교정책의 변수는 중국이다.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응키 위해 중국과 공통의 정치·경제적 관심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러시아의 영향력은 주변국에 그칠 뿐이다. 양국은 특정 사안에 공동 대응함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2005년 상하이협력기구(SCO)에서 양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반미 연합전선’을 구축, 우즈베키스탄이 미군 기지 철수를 요구토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중국의 경제·군사적 성장을 견제하고 있고, 중국은 최대의 경제 파트너인 미국·유럽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늘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관계는 냉전 이후 최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새로운 냉전이 도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러시아는 북극점에 다다를 수 있지만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언 브레머 국제정치 컨설팅회사 유라시아 그룹 대표
정리=홍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