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위로한답시고 상처 덧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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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국 영화를 통해 본 미국 사회는 이른바 ‘위로의 기술’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듯합니다. 조금만 안쓰러운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아임 소리’(미안해? 아니죠. 유감이다? 맞습니다. 혹은 저런, 안됐다, 어쩌니, 등등의 뉘앙스 같습니다)가 터져 나오고, 더 나아가면 와락 껴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하는 모습이 아주 익숙하게 등장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위로의 기법 역시 미국 영화 속에서는 활용도가 높습니다. 주인공이 소파에 반쯤 누워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이 근육질 남녀가 운동하는 모습만큼이나 흔히 등장하지요. 물론 상담비가 꽤 비싸다는 정보도 함께 나오곤 합니다.

 그렇게 발달된 기술로도, 쉽게 위로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깊이도 있을 겁니다. 미국이든 어디든 말입니다. ‘레인 오버 미’(원제 Reign Over Me·6일 개봉·스폰지하우스 압구정점·사진)가 이런 얘기입니다. 코미디 배우 애덤 샌들러가 주연하지만 웃음보다 눈물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가 연기하는 찰리라는 남자는 9·11 테러로 아내와 세 딸을 잃었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그에게는 가족의 전부였지요.
 찰리와 대학시절 룸메이트였던 치과의사 앨런(돈 치들)은 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목격합니다. 졸업 이후 서로 연락 없이 지내 왔지만, 앨런은 찰리가 겪은 일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요. 그 비극 때문에 찰리는 반 폐인이 된 듯합니다. 하루 종일 비디오게임과 기타 연주, 그리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부엌을 새로 꾸미는 일로 소일합니다. 혹 가족 얘기가 나올라치면 발작적으로 격분하는 것이 미친 사람 같기도 하구요. 보상금 덕분에 먹고살 걱정은 없다지만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닙니다.

 선량한 앨런은 찰리를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여깁니다. 찰리의 변덕을 달래가며 정신과 의사(리브 타일러)와 꾸준한 상담을 주선하지요. 그렇다고 찰리가 쉽게 마음을 여는 건 아닙니다. 찰리는 가족과 행복했던 시절 자체를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가족을 잃어버린 비극 역시 외면하려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좀 다정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죄책감 역시 잊고 싶은 거죠.

 이 영화의 결말은 희망적인 해피 엔딩인데, 그 엔딩에 이르는 방식이 꽤나 조심스럽습니다. 아마 미국인에게 아직도 생생한 9·11 테러가 모티브라서 더 그랬던 듯합니다. 아무튼 제 나름으로 이 영화의 목소리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각종 위로의 약효가 발휘되는 데는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슬픔과 위로, 고통과 치유가 자동판매기의 동전과 음료수처럼 실시간으로 연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안 그렇다는 거죠. 위로가 쉽지 않다는 거, 위로에 서툰 사람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되는 말일 듯합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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