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정동영의 '2인자 모델'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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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2인자의 부상이란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것 같다. 미국에서조차 1년차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일은 "부통령, 당신은 대통령이 아니야"란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금언이 있을 정도다.

부시 미 대통령은 "딕 체니 부통령을 한명 더 복제하면 내 일이 한결 줄어들 것"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가장 실력있는 2인자로 손꼽힌 체니 부통령은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의 그림자 속에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

쉽잖은 길을 걸었던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도 세가지 신조를 지켰다. "개막식 테이프를 자르지 않고, 남을 놀라게 할 말을 하지 않으며, (관공서에 내걸) 서체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2인자에겐 겸손이 사활의 요체인 듯하다.

지금 한국에선 새로운 '2인자 모델'의 실험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관계다. 노란 점퍼로 시장통을 누비는 鄭의장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에도 열린우리당의 부상을 가져왔다.

대통령-여당 대표의 고정관념에서 보면 집권 1년이 채 안 된 청와대로선 찜찜한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그런 鄭의장의 인기에 "盧대통령은 '실용적 관점'에서 환영하고 있다. 모든 걸 존중할 것"이라고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전했다.

'정치적 품앗이'란 측면에서 둘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대선 후보 경선 때 둘은 소원했다. 鄭후보 측은 "盧후보는 과격하다"고 했다. 盧후보 측은 "맹목적 신자유주의자로 콘텐츠(내용)가 없다"고 비난했다. 盧후보에게 노사모가 있던 반면 바람을 기대한 鄭후보는 선거 참모로 차 한대를 못 채웠다. 鄭의장은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다"며 이미지를 중시하지만 盧후보는 스킨십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조적 코드다. 역으론 '보완재'다.

'경선 지킴이'였던 鄭의장은 경선 후 5개월을 관망했다. 천정배 의원의 설득에 盧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경선 후보들이 승복하지 않거나 비켜서 있을 때였다. 盧캠프는 비로소 "국민 경선 후보"라는 용어를 자신있게 썼다. 盧대통령은 그때 "전국적으로 먹히는 鄭의원의 얼굴이 내겐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盧대통령은 사석에서 "아무래도 신당의 총선 얼굴은 정동영씨가…"라고 운을 뗐다. 이를 전해듣고 화가 난 김원기 전 의장을 다독이느라 무진 힘이 들었다고 청와대 핵심참모는 토로했다. 이 참모는 "대통령의 인간적 신뢰야 金전의장이지만…. 총선에서 안정만 되면 다 잘 풀리지 않겠느냐. 워낙 환경이 이러니까…"라고 여운을 남겼다. 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느니 '집권 초 2인자의 급부상'이라는 차선의 게임을 감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당.정 분리, 총선 후보 경선으로 지도부의 공천권이 미약해진 여권의 시스템도 새 2인자 모델을 가능케 한 촉매였다. 공생.보완으로 닻을 올린 1, 2인자의 관계가 총선 결과에 따라 어떤 그림을 그릴지 이 실험의 귀결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최 훈 청와대출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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