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 몸값 2000만 달러 받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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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01면

6주간 탈레반에 억류됐다 풀려난 한국인 19명이 서울행을 준비하던 1일 오전(현지시간).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오마르가 이끄는 지도자위원회의 한 인사는 “19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한국 정부로부터 2000만 달러 이상의 몸값을 받았다”고 밝혔다. 베일에 가려진 석방 협상의 얘기들이 계속 나올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탈레반 지도자 밝혀 … 정부선 부인하지만 계속 논란 부를 듯

김만복 국정원장이 현지에서 노출되면서 몸값 지불 의혹은 불거질 수밖에 없게 됐다.
‘2007년-대한민국 탈레반 피랍기’로 불릴 정도로 전 국가적인 에너지를 소모한 이번 사건은 피랍자들이 풀려났음에도 여러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정부가 테러단체와의 협상 전면에 나서면서 대외 이미지도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배형규·심성민씨 왜 살해됐나=탈레반이 사건 초기 협상력 강화를 위해 살해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탈레반과 우리 측의 중개 역할을 한 이들은 배 목사가 22명을 모아놓고 두 차례 예배를 집전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것이 빌미가 됐을 수도 있다고 전한다. 한국인들이 타고 있던 차량 안에는 파슈툰어로 된 성경책도 발견됐다고 한다. 탈레반은 ‘이교도의 우두머리’라며 배 목사를 숲으로 데려가 총살했다는 전언이다.

심씨 살해에 대해선 그가 위성전화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됐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탈레반은 한국인들을 납치한 후 휴대전화를 모두 수거했었다(유경식씨 증언과도 일치). 탈레반은 다른 한국인들에게 “심씨가 서울로 갔다”고 거짓말했다. 당시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이 카불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탈레반 측이 아프간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 점검 차원에서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

◇탈레반 협상대표의 정체=심씨 살해 즈음까지는 가즈니 지역의 탈레반 조직이, 이후 중앙조직이 직접 지휘했다는 게 우리 측 분석이다. 한국 측은 대면접촉이 시작된 지난달 10일 탈레반 측 협상대표인 ‘바시르’와 ‘나스룰라’ 등이 과거 탈레반 집권 당시 핵심 인물임을 사진 대조작업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들이 밝힌 이름은 가명이었다. 탈레반은 또 카불과 가즈니에서 활동하던 우리 대표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어 우리 대표단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탈레반 대변인은 그동안 언론에 오르내린 카리 유수프 아마디 등 4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몸값 지불의 진상은=영구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과거 납치사건에서 몸값을 지불했다고 인정한 정부는 없다. 중동ㆍ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이날 귀국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도 “그런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뭐가 올랐나=탈레반은 수감자 맞교환 요구를 내린 뒤 한국군 철군과 선교활동 중단, 공개 기자회견, 이를 위한 신변보장을 요구했다. 마지막 협상 타결 뒤 우리 측 협상대표의 기자회견 동석도 요구했다. 국제사회에서 실체로 인정받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요구다.

반면 이들에 대한 소탕전쟁을 하고 있는 아프간 정부와 국제안보지원군(ISAF) 입장에서 보면 이 요구는 지난 5∼6년 대테러 전쟁을 허무하게 하는 뼈아픈 카드다. ISAF는 전쟁 중 총을 내리고 ‘테러세력’ 이 한국 정부와 언론 앞에 당당히 서 있는 현장을‘보호’해줘야 했다.

◇국면 전환은 언제=8월 10일 대면접촉이 시작된 뒤다. 대면접촉은 모두 네 차례. 3차 대면접촉 후 탈레반 내 강온파 갈등이 일어나 2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슬람국가들의 영향력도 컸다. 송민순 장관은 사우디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이슬람국가의 종주국 같은 위치에 있다. 입국 전 사우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적신월사(ICRC)를 접촉 창구로 활용한 것도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이 치러야 할 비용=한 외교관은 “19명의 생명은 건졌지만 외교적 후폭풍은 엄청날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테러문제 대응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탈레반 고위 인사는 “받은 몸값으로 통신장비를 재정비하고 자살폭탄 테러용 차량을 더 구입하겠다”고까지 했다. 전날 아마디 대변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계속 납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협상이었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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