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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형 사업의 ‘불황’을 갈망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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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학생인 아들이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 근처 백화점 건물 내 양식당 체인점이었다. 주방 보조를 맡아 낮부터 한밤까지 샐러드 만들고, 과자를 튀겨 내고, 키위 털 벗기고, 청소도 했다. 바쁜 낮 시간엔 밥 먹을 엄두를 못 내고 오후 4시나 돼야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직원이 휴가를 가도 사람을 보충해주지 않아 진이 빠질 지경이라고 했다. 조리기구에 팔을 데어 귀가한 날엔 나도 모르게 분이 치밀었지만, 다 경험이려니 싶어 차마 그만두라고 몰아대지 못했다.

아들의 시간당 임금은 3200원이었다. 법정 최저임금이 3480원인데 너무한다 싶었다. 아마 수습사원 따위의 명목으로 임금을 줄인 듯했다. 한 달 열흘가량 일하고 110만원 남짓 받아 온 아들이 하는 말. “비정규직 아저씨 아줌마들 데모하는 심정이 이해되던데요.”

임금이 형편없는데도 그나마 지난여름 많은 대학생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못 구해 애먹었다고 한다. 최근엔 20대 비정규직 월급 평균액에 빗댄 ‘88만원 세대’라는 서글픈 신조어가 나왔다. “40, 50대가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포스트 386’ 세대가 나라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386세대에 품고 있는 반감이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구인(求人)배율’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 수를 구직자 수로 나눈 수치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대학졸업자 구인배율은 0.25였다. 일자리 하나에 4명이 달려들었다. 일본은 정반대다. 내년 대졸 예정자 구인배율은 2.14. 일자리가 넘쳐난다. 불경기가 계속되는 한국에서는 저임금에 기대는 인재파견회사, 대부업체 같은 ‘불황형 사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식당이든 수퍼마켓이든 ‘가격파괴’를 내걸지 않으면 도대체 장사가 되지 않는다. 1000원짜리 김밥, 3000원짜리 삼겹살이 등장한 지 꽤 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일본이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확 달라졌다. 2003년 일본의 시간당 아르바이트 평균임금은 898엔(약 7360원)이었다. 일할 사람이 모자라는 요즘엔 980엔(약 8040원)을 넘어섰다. 가격파괴에 의존하던 일본 맥도널드는 지난해 5월 전품목의 60%를 대상으로 품질을 고급화하고 가격을 인상해 성공을 거뒀다. 1995년 설립돼 장기 불황을 타고 승승장구하던 굿윌 그룹의 ‘불황’은 더욱 상징적이다. 인재 파견과 노인 돌보기가 주업종인 굿윌 그룹은 불경기에 넘쳐나는 구직자들을 싼값에 기업에 조달하는 방법으로 재미를 봐 왔다. 95년 설립 당시 1800명 선이던 굿윌의 등록 구직자가 지금은 278만 명을 헤아린다니 얼마나 급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경기가 호황으로 반전하고 사람 값이 비싸지면서 굿윌도 허덕대기 시작했다. 올 상반기 적자액이 무려 300억 엔을 헤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굿윌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임금을 교묘하게 떼어먹었다는 이유로 소송에도 걸려 있다(아사히 신문 7월 16일, 8월 24일자).

한국은 상반기 실업급여 신청자가 36만 명을 넘어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재학 중 아르바이트 구할 때부터 뜨거운 맛을 본 대학생들이 안정적인 공무원·교사직이나 공기업 취직에 매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관청과 공기업도 중요하고 보람 있는 직장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 같은 취업 열기는 분명히 건강하지 못한 현상이다. 이 점에서도 일본은 정반대다. 교사 지망생이 줄어 지자체마다 비상이 걸렸다. 다른 지자체에서 교사 임용시험을 치르는 등 ‘사람 뺏어오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중소기업 초임은 몇 년째 대기업을 웃돌고 있다. 좋은 인재를 모셔 오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세금 쓰는 일 무서운 줄 모르고, 돈 벌고 일자리 만드는 기업을 악덕 상인쯤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싫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손으로 돈 벌어 본 적 없고, 말끝마다 민주니 평화니 번지르르하게 외치고 다닌다. 호황을 누리는 불황형 사업들을 ‘불황’에 빠뜨릴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