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지는 불 「과거청산」/고대훈 파리특파원(특파원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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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나치 동조해 유대인 학살한 당시장교 법정에
『프랑스인들은 2차 대전중 나치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만 했는가.』
2차 대전중 유대인을 학살한 한 프랑스인을 17일 반인륜행위란 죄목으로 반세기만에 법정에 세운 프랑스가 자신들을 향해 던지고 있는 반문이다.
프랑스가 자국인을 반인륜행위로 재판에 회부,나치 점령기에 프랑스인들이 유대인 말살정책에 동조하며 자행한 만행을 심판하기는 프랑스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87년 반인륜행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숨진 「리용의 도살자」 크라우스 바르비도 반인륜행위가 적용됐으나 그는 가해자였던 독일인인 반면 이번 사건은 프랑스인이란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발단은 나치의 꼭두각시였던 비시정부 아래에서 레지스탕스를 색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병대의 폴 투비에(78)라는 한 정보장교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사건에서 비롯된다. 투비에는 44년 6월 나치의 고위관리 한명이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된데 대한 보복으로 이튿날 무고한 유대인 7명을 총살에 처했다.
해방되자 잠적한 투비에는 46년과 47년 두차례에 걸친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67년 형사적으로 소멸시효가 지났고 71년에는 조르지 퐁피두 전 대통령이 역사를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사면령을 내려 법적으로 투비에는 자유인이 됐다.
그러나 프랑스의 여론은 오히려 거꾸로 나갔다. 바르비에 대한 추적이 본격화 되고 투비에도 반인륜행위로 고발됐다.
전쟁중이나 전쟁전에 민간인에게 암살이나 말살정책을 행한 개인이나 단체 또는 이에 가담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반인륜행위죄는 소멸시효가 없고 일사부재리도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89년 체포된 투비에에게 7개의 죄목이 적용됐으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공소가 기각되고 44년의 유대인 학살만이 유죄가 인정돼 이날부터 5주 동안의 심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미국의 도움보다는 레지스탕스를 통해 해방을 자신이 쟁취한 것으로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투비에 재판은 자국인들이 동족인 프랑스계 유대인에게 자발적으로 박해를 가했다는 실상이 처음 역사위로 떠오른다는 사실에 침통한 표정들이다.
71년 퐁피두 대통령의 측근 보좌관으로 있던 에두아르 발라뒤르 현 총리마저도 사면령에 대한 배경을 증언하게 되고 프랑스인의 부역행위가 수십명의 증언을 통해 친독행적이 적나라하게 폭로될 것이다.
투비에는 독일의 명령으로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던 일이며 수백명의 동족을 사살하라는 독일을 설득,7명의 희생자만을 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의 명단」을 인용,프랑스판 쉰들러였다고 반론을 펴고 있다.
프랑스는 이번 재판을 진실과 역사에 대한 재판이며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재판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반세기가 지나 모든이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어두운 과거를 파헤치려는 프랑스인들의 용기는 아직도 친일파의 잔재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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