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고 한상일 교사 제자들에게 쓰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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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젯밤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동안 전 매스컴을 통해 우리학교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드러나면서 너희들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내가 괜한 일을 한건 아닌지 하는 후회를쉽게 떨칠수가 없었다.
참다참다 못해 이른바「양심선언」이란 걸 하고난 우리 선생님들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학교가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을때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너희들이야 오죽하겠니.
학교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이 새삼 신기한 종교집단 보듯 우리학교 정문을 가리킬 때,유난스런 학칙때문에 뒤통수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를 한 너희들을 마치「왕국」에서 사육당하는동물인 듯 측은히 여기는 눈들을 볼때 차라리「묻 어둘 걸」하는후회가 스치지 않은 것이 아니란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참는 것이 과연 너희들을 위한 길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본단다.
얘들아,너희들은 이해할 수 있겠니.선생님이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너희들 보는 앞에서 교장선생에게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을듣고,교장이 학부모들 앞에서 교사들을 가리켜「충견」「×개」운운했다는 소문을 듣는 심정을.할당된 찬조금 징수액 을 채우기 위해 사정이 여의치 않은 집안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벌려야하는 심정을.
『이 학생을 봐주라』는 웃분의 말 한마디에 갈등을 거듭하다 들어주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끝내 교육자적 양심을 버리고 점수를 고칠때의 그 심정을.
그러면서도 교단에 서서는 스승입네 하고 사람사는 길을 가르치고 지식을 전달할때 그 자괴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거야.
얘들아,급기야『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자랑스런 스승은 못될 망정 부끄러운 스승은 되지말자』며 몇몇 선생님들이 모여 양심선언을 준비할때 그 참담함과 두려움과 가슴 벅찬 흥분을 이해할 수 있겠니.
부끄럽게도 생계를 위해 호프집 개점을 몰래 알아보고 심지어 막노동까지 생각했지만 막상 신문사를 찾아갔을 때는 이제 중학교에 입학한 첫딸과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국민학생 둘째딸의 얼굴이 아른거려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단다.
우리들의 양심선언으로 나라안이 들썩거리는 가운데서도 이따금 곤혹스럽단다.교무실안에는 선생님들이 갈라서있고 교단에서는 솔직히 너희들 보기가 두렵기조차 하단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비단 우리학교들만의 문제겠니.
사실 우리학교문제가 사회적으로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단다.사람들의 반응속에서 우리의 문제들이 비단 이학교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을 둔 모든 학부형의 문제,나아가 교육을 백년대계의 뿌리로 하고 있는 국가의 문제라 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단다.
너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언젠가는 한번 겪어야 할 아픔이라고 생각한다.너희들도 보다 인간다운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껍질을 깨는 아픔이라고 생각해줄 수 없겠니.얘들아,다시는 부끄러운 선생님이 되지 않으마.장차 이학교에 들어올 너 희들의 후배에게『우리는 자랑스런 모교를 가지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있도록 다같이 노력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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