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老외교관의 한국짝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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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駐韓체코대사관의 야로슬라브 바린카 대사대리는 요즘 겉으로 보기에 밝은 표정과는 달리 가슴속에 무언가 허전한 생각들로 가득차있다. 63세의 나이가 자기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곰곰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다.오는 4월로 임기가 만료돼 공직을 떠나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아니 오히려 그것은 그를 홀가분하게만들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요즘 그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바린카대사대리의경력을 보면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남은 여생을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아닐까 추측해볼수 있다.
그는 웬만한 한국사람보다 한국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金時習의 金鰲新話와 朴仁老의 가사집을번역하기도 한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흡사 전문용어를 즐겨 구사하는 국문학교수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 는 착각이 들정도다. 그에게「한국어를 잘하는 외교관」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그는 차라리 한국학학자에 가깝다.그런데 믿기 어려운 것은 그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거의 평생을바쳐 한국을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다.
젊은 바린카는 프라하의 동방학연구소 산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항일운동가를 사사했고,프라하대학 한국학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한국연구에 들어갔다.
59년부터는 체코과학원의 동방학연구소 한국학연구원으로 일하며「한국연구」의 기쁨에 푹 잠긴다.
70년대초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平壤주재 체코대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 바린카는 이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동방학연구소의 연구원 자격을 박탈당한 채 20여년간 체코 외무부의 하급직원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그는 그 시절을「아무 것도 없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바린카가 舊체코슬로바키아의 대사로 한국에 부임한 것은 91년7월.꿈에도 그리던 한국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평생 한국을 사랑한 그에게 한국이 가져다 준 것은 섭섭함에 다름 아니다.
『나는 한국이 좋아서 일생을 한국연구에 바쳐온 사람입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한국말을 잘하는 외교관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언론들은 내가 여타 東歐圈 출신 외교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목적으로「양성된」한국전문가 정도로 취급하고 말았습니다.한국에 대한 나의 특별한 애정은 단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외교관이라는 흥미거리로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사귀게 된 한국친구들이 자신의 北韓액선트를 비꼬아『피양(平壤)에서 한국말 공부했구먼』하며 삐딱한 시선으로 볼 때가 제일 괴로웠다고 한다.
그는 아직까지 독신이다.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체코에 다음달 들어간다.가기 전에 한국에서 여생을 바칠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아직 그에게는 한달후에 무엇을 하게될지 모르는희미한 미래만 있을 뿐이다.그에게 왜 한국을 연 구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다만 그의「한국짝사랑」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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