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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족한 골드미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호 15면

인생에 내세울 거라곤 남들보다 먼저 시집가서 애 낳은 것밖에 없는 이 아줌마한테 ‘골드미스’의 삶은 일종의 판타지다. 만약 그때 애 키우며 일하느라 허덕대지 않았다면 지금 근사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월급 받아도 쓸 시간이 없어서 쌓이던 통장 잔액이 거액의 목돈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열심히 외모를 가꿔와서 지금보다는 훨씬 멋쟁이가 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그려보는 상상은 거울에 비춰지는 두툼한 뱃살과 매일의 끼니 걱정과 아이 성적 같은 현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니, 어찌 그들의 삶이 부럽지 않으랴. 구박받던 ‘노처녀’들이 ‘골드미스’라는 근사한 용어로 대접받는 요즘 드라마에서도 이들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이른바 ‘삼순이’ 효과인 듯도 하지만, 정말 주변에 널린 짝없는 노처녀들의 현실적 고민과 나처럼 그 시절을 동경하는 아줌마들의 판타지가 겹쳐서인 듯하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매체들 속의 ‘골드미스’들 가운데서도 엄정화는 으뜸으로 보인다. ‘9회 말 투 아웃’의 수애나 뚱뚱한 외모의 ‘막돼먹은 영애씨’, 혹은 노처녀 헤로인의 원조 삼순이보다 엄정화는 몇 레벨 위의 골드미스로 보인다. 일단 나이로 봐서 갓 서른 살 넘긴 주제에 노처녀의 애환을 들먹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절절해 보이고, 오랫동안 조금씩 변화를 거듭하는 그의 얼굴마저 경륜을 말해준다고나 할까. 자신만의 캐릭터를 단단히 쌓아올려 직업에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그러면서도 아직도 귀엽고 섹시한 패션의 첨단 트렌드를 이끌어 가고 있으니, 정말 모든 것을 겸비한 ‘골드미스’가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칼잡이 오수정’에서 ‘골드미스’의 기준에는 좀 못 미치는, 결혼정보회사의 점수 62점짜리 ‘실버미스’를 연기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오수정은 엄정화의 실제 이미지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돈과 직업만으로 남자를 고르겠다는 발칙한 ‘된장녀’ 오수정이 밉상일 수도 있지만, 섹시함을 강조하며 여성들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낸 엄정화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다. 연봉 3000만원 이하라면 꿈도 못 꿀 근사한 옷차림과 명품으로 꾸미고 다니는 오수정에게 리얼리티 운운하며 비웃고 싶다가도, ‘그렇다고 엄정화가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나오는 것도 보고 싶지 않잖아’라며 슬그머니 비난의 시선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수정은 현실 속의 엄정화가 그런 것처럼 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똑똑한 ‘골드미스’들의 역할 모델을 제시할 의무가 있어 보인다. 사법시험에 떨어졌을 땐 차버린 노예형 남자에게 알고 보니 오래된 사랑의 감정을 쌓아왔다면서 그의 품으로 폭 안겨버리는 결말은 뭔가 좀 허전하지 않나. 인디언 추장 부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 내 옥수수는 여물지 않았어”라고 주장하던 오수정에게 ‘늙다구리’ 아줌마도 충고할 만한 말은 있다. 오수정. 보석 디자이너라는 근사한 직업을 너무 ‘구질구질한 가정경제를 위한 생계 방편’으로만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 하다못해 ‘커피 프린스’ 종업원인 고은찬도 일 때문에 그 좋다는 사장님을 버릴 생각까지 하잖아. 멋진 파티시에가 된 삼순이는 어떡하고. 자신의 일에 더 단단한 실력을 쌓으며 스스로가 더 여물어지길 바라. 그래야 아줌마가 동경하는 ‘골드미스’의 판타지가 완성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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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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