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벌레의 눈, 새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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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재미 있었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을 숨기기 힘들었다. 전미 오피스박스 1위를 기록했다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얘기다. 주인공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에게 일왕은 영어로 말을 건네고, 알그렌은 일본말로 "하이(네)"라고 대답한다. 사무라이(무사) 정신에 매료된 알그렌은 사무라이를 뜻하는 모실 '시(侍)'자를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와중에도 사무라이 가쓰모토(와타나베 겐)는 흩날리는 벚꽃을 홀리듯 바라보며 "퍼펙트(Perfect.완벽하군)"라고 말한다. 톰 크루즈가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사무라이는 아티스트이자 철학자"인 셈이다.

1870년대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과 신식 군복의 대결은 애초부터 결과가 뻔했다. 그러나 열일곱살 때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일본문화에 눈이 떴다는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패자의 손을 번쩍 들어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한국인은 사무라이 갑옷에서 임진왜란을, 신식 군복에서 일제시대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그럼 미국인은? 전혀 다를 것이다.

'새의 눈(bird's-eye view.조감도)' '벌레의 눈(worm's-eye view.앙시도)'이라는 말이 있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두 가지 눈을 균형있게 활용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벌레의 눈은 미시적이고 주체적이며, 강렬한 자의식을 필요로 한다. 자주(自主)요 자존(自尊)이다. 반면 새의 눈은 거시적이고 통시적이다. 자기를 객관화할 줄 아는 능력이다.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는 눈이다. 이미 1980년대에 TV드라마 '쇼군(將軍)'을 통해 일본에 호감을 가졌던 미국인들은 '라스트 사무라이'로 일본을 보는 눈을 한 차원 높이게 됐다. 우리가 보기엔 억울하고 미흡할지라도 그들은 일본에 대한 '새의 눈'을 갖췄다고 생각할 것이다.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힘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아직 없다.

지난달 문화관광부의 의뢰로 국가브랜드 경영연구소가 조사해 만든 '문화를 통한 국가브랜드 가치 제고전략' 보고서를 보면 '밖에서 본 한국'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미국.유럽.중국인에게 가장 많이 인지돼 있는 한국 관련 이미지는 여전히 '한국전쟁'이었다. 중남미.일본.동남아인은 다행스럽게도 '월드컵 개최'를 첫 손에 꼽았다. 우리의 경제수준은 어떻게들 보고 있을까. 미국인과 대만인은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을 실제의 절반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중국인은 실제의 10분의 1, 동남아인은 17분의 1 정도로 알고 있었다. '새의 눈'이 모자라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새든 벌레든 어느 한쪽의 눈만 갖고는 개인도 국가도 잘 살아가기 어렵다. 창으로 물속의 물고기를 잡을 때, 눈에 보이는 대로 찔렀다가는 백번 실패한다. 빛의 굴절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수면 위로 뛰어올라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곤충을 순간적으로 낚아채는 물고기조차 그런 이치를 체득하고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지만, 반대로 고래가 춤을 춤으로써 칭찬이 나오게끔 조련사를 훈련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의 생각, 사물의 다른 면은 아무래도 새의 눈이 더 잘 본다. 동해나 독도를 놓고 왜 일본과 '고(古)지도 경쟁'을 벌이는가. 국제사회라는 새의 눈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려놓기 위해서다. 벌레의 눈만 갖고 입으로만 '자주'를 외친다면 자칫 측은한 마스터베이션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사회엔 벌레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