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통치권」시대 아니다/안경환(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세상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사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인의 행동 패턴으로는 김 후보의 전력이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무엇보다 「민자당」을 만들어 끝내 후견인의 자리에 오른 그의 정치책략이 참기 어려웠다.
○3당합당 책략에 실망
문민시대를 보다 앞당겨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87년 선거때는 하늘이 무심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전에는 그렇게나 야속하게 이 나라의 야당 대통령후보를 데려가곤 하시더니 왜 이번에는 그냥 방관만 하시느냐고,한치도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양김씨」중 한사람을 하늘이 택해 주셨으면 하는 심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김 대통령은 「기대 밖의 과단성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표적수사든,정치보복이든. 어쨌든 과감한 숙정작업을 통해 꼴보기 싫던 무리들을 눈앞에서 치워주었다.
청와대는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약했고 지금껏 그 공약은 성실히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고위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했고,금융실명제도 실시해 검은 돈의 횡류를 막았다. 비록 세부적 사항에 있어서야 허점도 많고,어정쩡하게 마무리한 곳도 있지만 적어도 도덕정치와 공정거래의 기본원칙만은 선명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괄목할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대통령은 결코 「통치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개혁의 일을 「통치권자」의 결단으로 해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임자들의 시대착오적 발상을 답습하는 것이다. 국민주권의 민주국가에서 「통치권」이니,「대권」이니 하는 단어는 설 땅이 없다. 이러한 어휘는 전제군주제 국가의 유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어휘는 나라의 주인이 하인을 다스리는 권한이라는 뜻이 진하게 풍긴다. 국왕이 신민을 다스리는 근거가 이른바 통치권이요,대권이다. 이러한 용어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 건설과 함께 고어사전 속에나 묶어두어야 했을 언어들이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법적지위는 나라의 공복중 우두머리일 뿐이다.
○재임 1년 괄목할 업적
물론 대통령에게는 국가원수와 행정부의 수반자격에서 헌법상 특별한 권한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은 어디까지나 법이 인정한 권한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적정한 절차를 거쳐 헌법이라는 문서를 통해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한일 뿐이다.
재임 1주년 기념회견에서 「대통령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것」이 대통령제의 본령이라고 김 대통령은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행여 대통령은 국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말했다면 그것은 중대한 착오임을 알아야 한다.
국무총리에게도 국무위원 제청권이라는 헌법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대통령은 왕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김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치적은 민주 법치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나라에서라면 굳이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 대부분이다. 사정·부정부패 척결은 소신있는 감사원장과 검찰총장 두사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둘중 한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전임자들 시절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대통령 스스로가 법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들은 은연중 자신은 법위에 서있는 「통치권자」라고 믿고 있었을지 모른다.
청와대를 건축하면서 거대한 연회석을 겸비한 현대식 왕궁을 모델로 삼아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지한 자금성을 구축한 발상이 한 예다.
대통령을 왕으로 모시는 주변 집단들의 의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민자당 전당대회를 연기하는 총재의 결정이 「통치권 차원」의 문제이기에 법으로 문제삼을 수 없다는 어느 당직자의 「무식한」 충직이 모여 문민왕을 등극시키게 되는 것이다.
○「법」지키는 전통세워야
아침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뛰는 건강한 대통령의 모습은 덕수궁 박물관에서 보는 국왕의 노부모가 아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단견을 부끄러워한다.
민자당을 장악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제도속에 들어가 합법적으로 제도를 바꾼」 수준높은 법률가적 개혁인데 그것을 단지 「정치십단」의 얄미운 묘수라고 치부한 나의 치기를 반성한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기우에 이 한마디는 꼭 드려야겠다. 대통령은 결코 통치권자도,국왕도 아니고 국민의 공복인 대통령일 뿐이라고.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아도 법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고.<서울대 법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