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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교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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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미국은 몰랐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워싱턴과 충분한 대화를 거쳤다.”
 
8일 청와대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발표한 직후 “미국과 사전 협의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불거지자 정부 관계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이튿날 미 국무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며 한국과 (사전에)협의를 했다”는 논평을 냈다. 이를 두고 주미 대사관 관계자는 “우리 언론이 하도 몰아가니까 미국이 그렇지 않다고 직접 확인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기자가 직접 만나본 미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발표 몇 시간 전에야 한국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래도 몇 달 전부터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라는 얘기를 한국 측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뿐이 아니다. 한·미 동맹에도 더 큰 앙금을 남겼다. 애초 정상회담 일자(28~30일)가 연례 한·미 연합 을지포커스렌즈(UFL) 연습 기간(20~31일)과 겹치게 정해지자 미 국방부는 한국이 훈련을 연기 또는 축소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회담 발표 이틀 뒤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 판문점 군사회담에서 UFL연습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딱 부러지게 거부하지 않았다. 게다가 청와대 대변인은 “(회담 준비 과정에서 훈련 연기)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펜타곤(미 국방부)의 의혹은 증폭됐다.

결국 회담 발표 사흘 만에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이 자청해서 우리 정부 당국자를 만났다. 롤리스는 “북한이 오래 전에 결정된 UFL연습 일정을 알고서도 이 기간에 남북 정상회담을 열자고 한 건 훈련 취소나 축소를 노린 것 아니겠느냐”며 “한국이 북한의 그런 요구에 동의해 준다면 한·미 연합전력의 준비태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전례 없이 강한 경고다. 미 국방부는 이에 앞서 한국 국방부·외교부와 한·미연합사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 같은 내용의 경고음을 전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김장수 국방장관이 “한·미 동맹에 큰일이 생길 수 있다”며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회담 발표 닷새 만인 13일 “한국군 단독훈련 부분만 연기하는 선에서 훈련을 그대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이 사건을 두고 워싱턴의 한 한반도 전문가는 “지난 5년간 한·미 간에 보이지 않게 쌓였던 감정과 불신을 보여준 것”이라고 촌평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훈련 연기를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경고부터 하고 나선 롤리스 특보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짚고 넘어가야 할 건 한·미 간의 믿음과 교감의 수준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7년 만에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이 자주적으로 벌이는 중대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회담이 성공을 거두려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협조도 필요하다. 특히 미국의 협조를 끌어내는 데 가장 큰 자원은 평시에 쌓아놓은 신뢰다. 탄탄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다면 자질구레한 일은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 있 다. 그게 동맹 관계의 기본적 바탕이 아닌가.

덮어 놓고 미국 말만 들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북핵 문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상회담 개최나 한·미군의 유일한 연합작전인 UFL연습 일정 같은 큰 현안을 조금만 더 신속·투명하게 의논하고 알려주는 배려만 하면 된다.

미국도 남북 대화의 의의와 순기능을 잘 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 쓰면 큰 원군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남과 북 모두에 이익이 된다. 나아가 통일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