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38. 영어는 수단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개교 당시 민족사관고의 교훈은 도덕성과 이상적 인간상,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덕목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개교 첫해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 나는 교훈을 바꿨다. 이와 함께 '영어 상용(常用)의 목적'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 구호는 조회를 비롯, 각종 행사 때 반드시 제창하는 민족사관고의 방향타가 됐다.

교훈은 다음과 같다.

'민족주체성 교육으로 내일의 밝은 조국을' '출세하기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자' '출세를 위한 진로를 선택하지 말고 소질과 적성에 맞는 진로를 택하자' '이것이 나의 진정한 행복이고 내일의 밝은 조국이다'.

다음은 영어 상용의 목적이다.

'영어는 앞서간 선진 문명 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의 목적이 아니다'.

공부의 목적을 학문 발전에 둬야 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이나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세다. 그런데도 굳이 교훈에 이런 문구를 넣은 것은 '서울대 진학=출세'라는 등식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면 민족사관고는 존재할 이유가 없고, 우리나라 교육도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영어 상용의 목적이 탄생한 이유도 비슷하다. 개교 이듬해인 1997년부터 나는 영어를 정복해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오늘날 학문을 제대로 하려면 영어에 능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일상 생활에 영어가 배어 있어야 한다. 나는 몇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 국어.국사를 제외한 모든 과목은 영어로 수업한다. 둘째, 일반교육관의 특정 구역에선 모든 교사와 학생이 영어를 써야 한다. 셋째, 이 같은 영어 상용 계획을 98년부터 전면 시행하되 준비 기간인 97년 한 해 동안 교사.학생은 영어 정복에 전력 투구해야 한다. 일정 수준의 영어 능력을 갖추지 못한 교사는 퇴출시킨다는 규정도 마련했다.

영어 상용은 1년 뒤부터 정착됐다. 부분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학생과 교사 모두 영어를 겁내지 않게 됐으니 대성공이었다. 민족사관고에서는 더 이상 영어가 넘기 어려운 장벽이 아니다.

민족사관고에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대를 목표로 한 유학반이 생기자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했던 '해외파' 학생들이 입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입학 시험 때 교사들을 능가하는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아이비리그 명문대 진학 비율은 오히려 '국내파'가 '해외파'를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영어 구사 능력만 놓고 보면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처음에는 우수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오고 미국 구경도 못했으나 머리는 뛰어난 학생들이 1학년 때는 '해외파'에 뒤졌으나 2학년만 되면 영어 실력이 비슷해졌다. 국내에서도 영어는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