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의 남자 읽기] 명절이면 날카로워지는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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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아내의 푸념을 받아넘겨야 할까.

결혼생활 14년째인 M씨(42)는 설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겁다. 그는 3형제 중 둘째며 명절엔 온 가족이 부모님댁에 모인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갑내기 아내는 명절 때면 예외없이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짜증을 낸다.

아내의 가장 큰 불만은 시댁 식구들과 어울려 일할 때마다 힘은 힘대로 들면서 좋은 소리도 못 듣는다는 것이다. 아내는 직장 때문에 명절 전날 저녁에야 겨우 시댁에 도착해 동서들과 함께 차례 준비에 동참한다. 전업주부인 동서들은 언제나 하루 이틀 전부터 일하게 마련인데 늦게 나타난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이런저런 막일을 시킨다는 게 아내의 주장이다. 차례를 지낸 후 설거지도 아내 몫인 모양이다.

이러다 보니 명절이 끝나면 상당기간 아내와 냉전 상태로 지내는 적도 많다. 물론 M씨도 아내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명절 연휴가 끝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직장으로 향하는 아내를 볼 때면 미안하고 안쓰럽다. 하지만 매번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며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아내를 보면 '날 보고 어쩌란 말이냐'란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화가 치민다. 지난해엔 아내의 불만에 '누가 제사 지내는 집에 시집 오라고 했느냐, 어머니는 더 힘든 일에도 군소리 한번 안 하셨다'고 되받아쳤다가 큰 싸움으로 번졌다.

올 명절은 또 어떻게 해야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M씨가 문제 해결을 정말 원한다면 아내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내가 만일 아내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자.

시집간 여자라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반응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아내는 어머니와 다른 세대, 다른 환경에서 사는 현대 여성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내에게 고무신 신고 가마솥에 불 지피며 살던 시절의 여성을 기준 삼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만일 아내가 명절 연휴에 온 가족이 해외 나들이를 가는 신식(?) 친구나 이웃의 생활방식을 들먹이며 앞으론 차례 대신 아이들과 여행 다니고 레저나 즐기며 추억거리를 만들자고 요구하면 어쩔 것인가.

아내의 심정을 이해한 뒤 M씨는 아내의 고충을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아내를 위해 개선책을 찾고 싶다는 표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명절 때마다 수많은 이 땅의 아내를 진정 화나게 하는 것은 힘든 일보다 아내의 고충에 무심한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태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내와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싶은 당신, 이번 설날만큼은 힘든 아내를 위해 따뜻한 말과 더불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 한가지만이라도 찾아보자. 그리고 지친 아내가 당신 곁에 누웠을 때 어깨라도 성심껏 주물러 주면 어떨까.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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