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 story] 삶이 겨워 노래 불렀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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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리에서 소리 한마디 못하는 건 도시에서 운전면허증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악 전국 경연대회 상 탄 이가 여럿이고, 진도군 대회까지 합치면 상장 하나쯤 없는 집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도대체 소포리는 왜 '소리의 고장'이 됐을까.

소포리는 물과 나무가 귀했다. 예전에 마을에 큰 샘은 하나뿐. 그나마 조금만 가물면 샘이 말라 5리쯤 떨어진 들샘까지 나가 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래서 진도에는 '소포에 큰애기 주지 마라'는 말이 있었다. 밤새 물 긷느라 잠을 못 자는 동네에 딸 시집 보내 고생시키지 말란 얘기다. 나무를 구하러는 배를 타고 10리 떨어진 작두섬까지 다녔다고 한다. 오래 전 얘기지만 1936년에는 그렇게 나무하러 갔다 오던 배가 뒤집혀 여덟명이 세상을 떴다. 아홉살 사내아이도 그때 삶을 마감했다. 다섯살이면 나무지게를 져야 했던, 물일.나뭇일 바쁜 동네에 태어난 죄였다.

염전도 있었다. 소금일 또한 고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중노동. 무거운 소금물을 수백통 나르고, 땀 뻘뻘 흘리며 불을 때 물을 증발시키고, "어지간히 실한 장정 아니면 척척 넘어갔제(쓰러졌다)"라고 차근현(72)씨는 회상한다. 그 염전은 70년 간척공사를 하며 자취를 감췄다.

그토록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고단함을 잊고자, 그런 운명에 대한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 소리였다는 얘기다. 노관민(67)씨는 "쌀이 읍서(없어) 좁쌀 껍덕지(껍질)를 쪄먹으면서도 돈 내고 소리꾼 청해다 배웠제"라고 말했다. 다른 곳보다 배는 힘든 삶을 버티어 주던 소리가 이제 희망의 소리로 변하고 있다. 소리의 고장이란 소문이 퍼져 관광객이 조금씩 늘면서 검정 찹쌀 같은 특산품 판매가 덩달아 증가하는 것. 소포리 김병철 이장은 올 봄엔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도 하겠다고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가끔씩 진도 검정 찹쌀밥을 해먹고 배를 두드리며 아리랑 한 곡조 뽑는 것. 그것이 김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꿈이었다.

진도=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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