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같은 무리 지으면 닮아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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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이면 정치적 승패가 갈릴 이명박(左)·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예비 후보. 그들의 시선은 왜 서로 다른 곳을 향할까.[중앙포토]

 고등학교 때였다. 조선 시대 당파의 갈래와 계보를 도표로 그려 이해해보려 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에 대북, 소북, 청남과 탁남, 노론과 소론, 공서와 청서, 벽파와 시파 등등. 각 당파 성립의 원인, 각 당파의 사상적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 당파 소속 인사들 사이의 관계, 본래 한 당파였다가 둘로 갈라서게 된 이유, 이런 것들까지 제대로 알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당파의 이합집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입당도 하지 않았던 당에 탈당계를 내는 의원도 있을 정도니,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이른바 범여권의 숨 가쁜 이합집산 과정을 이해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하고,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를 통해 고교 시절 포기했던 조선 당파 이해에 도전하기로 한다.

 작심하고 읽어봐도 역시 복잡하고 어렵다. 이번에도 포기해야 하나? 다행히 저자는 당파의 분립과 갈등의 보다 깊은 의미를 지적해준다. 당파 갈등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은 현종· 숙종 대의 예송(禮訟) 논쟁은 ‘헛된 관념 논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깨뜨린 공존의 틀은 조선 사대부 정치의 핵심이었다. 명분이 우선하는 성리학 사회에서 공존의 틀이 깨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예송 논쟁 이후 서인과 남인은 자당의 권력과 상대당의 허점을 이용해 서로를 죽이는 파행적인 길을 걸었다.

 공존의 틀을 깨고 서로를 죽이는 파행의 길이라 하니 낯설지 않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각 캠프에 하고 싶은 말이 아닐지. 선거철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그들로 갈라져 무리를 지어 다툰다. 데이비드 베레비는 『우리와 그들, 무리 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에서 무리를 짓는 부족적 감각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정체성과 소속감,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을 무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면, 상대편 후보 지지자들과 드잡이하며 다툴 수밖에 없는 걸까?

 베레비에 따르면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게 아니라, 한 무리가 되고 나서 비슷해진다. 정치적 비전과 정책이 같아서 한 정파가 되는 게 아니라, 일단 한 정파가 되고 나면 비전이나 정책 같은 건 억지로라도 비슷해지지 않던가. 무리 짓기가 “인간의 주관에 좌우되기보다는 처해있는 상황에 따른 것”이라는 말이 이합집산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애당초 주관과 소신 같은 건 우리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정치인들에게 말이다.

 혹시 앞으로 남은 대선 일정 속에서 다른 정당, 다른 정파에 속한 사람이 미워 죽겠거든, 상대방의 행태에 대해 과민반응하지 말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거나, 미워하는 까닭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이야기해보는 게 증오를 삭일 수 있는 방법이다. 증오의 대상과 마주할 수 있다면, 건설적이고 구체적인 협상을 시도하는 것도 좋다. 이것은 필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처방이 아니라 러시 W. 도지어 주니어가 쓴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사이언스북스)에 나오는 처방이다. 맹목적 열광이나 증오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합리적 선택만으로 정치가 이루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치는 인간의 감정을 먹고 자라는 생물이니 기대하기 힘들긴 하다.

표정훈<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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