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 이전 합의 이후] 용산기지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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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가 1백25년 만인 2007년 서울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용산 기지는 외세에 시달렸던 구한말의 근대사와 연결돼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는 용산에 머물며 대원군을 체포해 중국으로 압송했다. 용산이 종로와 한강을 바라보는 물류의 중심지이자 당시 도성으로 들어오는 이동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각각 왜군과 청군이 용산에 주둔했던 것도 이런 전략적 입지 때문이다.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용산에 자리잡았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한 바로 그 부대다. 1908년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 병영을 용산에 만들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군 지휘부가 용산을 점령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 시설을 그대로 접수했다. 그해 9월 서울에 들어온 미 24사단은 용산기지 시설을 이용했다. 49년 미군이 철수한 뒤 용산의 미군 시설도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용산의 외국군 주둔은 다시 시작됐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은 북한의 재침에 대비해 남았다. 이후 57년 주한미군사령부가, 78년엔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용산에 들어서면서 용산은 지금까지 한.미 연합방위체제의 지휘부 역할을 해왔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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