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2)치규가 놀란듯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일본의 패망이라니.이런 말을 조선사람의입에서 듣다니.문득 그는 그 패망이란 말에서 가슴이 뛰는 기쁨보다는 쓰리게 죄어드는 절망감을 느낀다.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흐 린 등잔불에 비친 젊은이의 얼굴은 입술을 굳게 한 일 자로 다물고 있었다.젊다는 것이 이것이로구나.힘이로구나.
치규는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팔굉일우(八紘一宇)」라고 저들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런 게뭡니까.그건 결국 좋은 의미로서만이 일본인이 된다.잘된 뜻으로서만이 일본인에 흡수된다.뭐 그런 말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끄덕이면서 치규는 생각했다.굉(광)이 크고 넓다는 의미이고 우(宇)는 집이니,그것도 차양이 있는 넓은 집을 말하는데다가,옛중국에서는 이 우라는 글자는 넓디넓은 땅,공간적으로 넓은 뜻을가진 것을 말했다.그와 달리 주(宙) 란 공간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커다란 격차가 있는 것을 말했다.그래서 이 드넓은 세상을 불러,우주라는 말이 되는 게 아니었던가.
『여덟이 넓어져서 하나가 된다.드넓게 넓혀서 하나를 이룬다.
그러므로 일본으로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치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 말따나,좋게 하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 말을 일본인들이 해석하는 것을 보면,천황의 능 아래 모여드는 민초를 모두 일가의 조직 속에 흡수하는 것이라고 했거든요.여기서 일가라는 것은 일본이라는 집이란 뜻이고,그것을 얽어매서,일본천황의사명은 세계적 평화통일에 있다…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 치규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일인전허(一人傳虛)면 만인전실(萬人傳實)이라 했지요.한 사람이 한 거짓말을 많은 사람들이 전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것이 사실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지요.』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런데 이게 바로「춘추」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춘추라니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