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자주·동맹 치우침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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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외교통상부 장관의 전격적인 교체를 계기로 우리 외교에서 자주냐, 동맹이냐가 논점이 되고 있다. 자주와 동맹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설사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어느 쪽에 확연히 큰 무게를 실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논점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실적으로 국제관계를 볼 때, 어느 나라이고 완전히 자주적일 수는 없다.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필연성을 어느 국가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4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우리는 중립도 어렵고 자주도 힘들어 외교를 펼치기가 몹시 힘든 동시에 그만큼 외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이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공산 침략을 막고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국권을 보전하고 자유를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정부는 물론 대다수 시민의 시각인 것만은 분명하다. 온 국토가 폐허로 변해 버린 처절한 상황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미국의 도움이 적지 않았던 것도 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국의 도움을 고맙게 여기고 미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을 외교의 기축(基軸)으로 삼아온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가까운 우방 사이라도 항상 모든 문제에 있어 의견이 같을 수는 없고 또 이해가 일치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 사이에서도 아주 친한 친구가 서운한 행동을 하면 그 섭섭함이 증폭되게 마련인데 이런 현상이 나라 사이라고 다를 수는 없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미국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비위에 좀 거슬린다고 해서 동맹을 저버리고 자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고마운 나라이니까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숭미(崇美)로 일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미국을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주장할 것은 주장해 국익을 위해 관철할 것은 기어코 관철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 주변은 '자주'를 주장하고 외교부는 '동맹'을 중요시하다 마침내 외교부가 크게 당한 듯한 인상을 국내외에 준 이번 사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겨서는 안 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만큼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경직된 외교부의 분위기와 미국이 가질지도 모를 의구심을 고려한 결과인 듯하지만, 정통 외교관료이고 대미외교에 밝은 인사가 장관으로 발탁되고, 그가 한.미 외교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힘쓰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은 잘된 일이다.

만사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인데, 앞으로 대미 관계를 엮어나감에 있어서는 자주와 동맹을 조화롭게 결합해나가는 외교의 묘를 살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자주와 동맹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또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하에서는 미국과의 호혜적인 우호협력 관계 유지가 무엇보다 긴요하다.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그렇고, 안보와 경제 등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양국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원래 약한 자는 강한 자에 따르는 것을 굴욕으로 여기기 쉬운 만큼, 강한 자는 약한 자가 굴욕으로 여기지 않도록 행동과 처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미국에 바라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대로 자주를 강조하는 나머지 이것이 배타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주의 자세는 견지하되, 동맹은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옳다는 것을 한.미관계의 앞날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아무쪼록 새 외교수뇌부가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대미외교를 슬기롭게 펼쳐나가길 바란다.

최호중 한국외교협회장,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