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탁상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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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탁상행정'. 현실을 무시한 행정을 비판하는 말이다. 공무원이 탁상에 앉아 머리와 서류만으로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공무원이 탁상행정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앉아 있기를 좋아해서일까, 능력이 없어서일까….

미국의 행정학자 레니 레인과 제임스 울프는 이를 행정문화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레인과 울프는 정부조직이 업적과 성취를 너무 강조할 경우 탁상공론적인 행정이 나올 위험이 있다고 했다. 공무원들은 업적을 내기 위해 조급해 하고 때로는 흥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레인과 울프는 이를 '높은 에너지 문화(high-energy culture)'로 표현했다.

이런 문화에선 공무원들은 무엇인가 한 건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에 몰두하게 된다고 한다. 야근을 밥먹듯 하면서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일을 재미있어 하고, 일을 많이 해야 유능하다고 믿는다. 모두 일에 미쳐버린다. 고도 성장기의 우리 관료들이 그랬다.

문제는 일에 에너지를 너무 쏟다보면 비판의식이 위축된다는 점이다. 일치단결해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들에겐 외부의 비판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자신들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는 환상에 빠지고 시야도 좁아진다. 여론 수렴도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또 차근차근 따져보는 대신 새로운 일들을 게릴라식으로 만들어내 추진하게 된다고 한다.

레인과 울프는 심한 경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공무원들은 '국민을 위한 행정'이라는 사명감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이것이 현실과 부닥치면서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설명이다.

새해 전국 자동차 번호판을 만들었다 12일 만에 디자인을 바꾸기로 한 건설교통부가 바로 그런 사례다. "촌티 난다"는 비판에 대해 처음엔 "자동차 등록체계 혁신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대응했다. 사소한 것 가지고 자꾸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선의의 목적을 앞세워 수단의 졸속을 덮으려 한 것이다. 결국 나중엔 여론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의욕은 좋았지만 외부 의견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친 셈이다. 공무원들의 에너지를 탁상에서가 아니라 발로 뛰며 연소시키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