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대통령 무책임제를 개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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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온 국민이 정치인을 규탄하고 있다. 나라의 사정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경제가 계속 어려워지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여덟 명의 현직 국회의원이 정치자금의 불법모금이나 유용 의혹으로 체포되고 대통령이 특별검사의 조사대상이 된 딱한 상황에서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도에 달한 것이다. 올해의 설 연휴는 즐거운 민족의 축제보다는 정치인에 대한 범국민적 규탄대회가 되고 말 듯싶다.

*** 정치인 규탄에 열올리는 국민

그러니 우리에겐 스스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의문들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선택하고 믿어왔던 한국의 정치인들은 보통국민과는 다른, 나라와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들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흉악한 집단들인가. 안정된 민주정치를 운영하는 외국의 정치인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모든 정치인들이 지금까지의 활동양식과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대오각성한다면 과연 우리 정치는 하루아침에 깨끗하고 생산적인 민주정치로 돌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자문(自問)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잘못된 정치의 틀, 즉 부적절한 제도 때문임을 이제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정치인에게만 돌을 던지기보다는 낙후된 정치의 틀을 과감히 바꿔보는 국민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생사결단을 단판승부로 내리는 대통령선거는 무차별 난타식 총력전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유지.운영되는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미 여러 해에 걸쳐 경험했다. 그러한 정치의 틀을 방치하면서 정치인의 허점만을 비판하는 것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음도 자명해졌다. 이제는 두 단계의 정치개혁을 지체없이 실천에 옮겨야 할 시점이다. 첫째는 선거법.정치자금법.정당법을 획기적으로 개정하는 작업이고 둘째는 대통령 무책임제에 종지부를 찍는 내각제 개헌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이미 국회에서는 의장의 주도 아래 4당의 합의로 선거법.정치자금법.정당법 개정을 위한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했으며 자문기구로 위촉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가 학계의 연구결과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종합한 개혁안을 지난 연말에 제출한 바 있다. 국회는 빠른 속도로 이 개혁안을 토대로 한 법개정을 단행하고 그에 의거해 4월 총선에 임하기를 바란다. 한편 각 정당은 이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선출되는 새 국회가 명실공히 의회민주주의의 중심이 되도록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놓고 선거 직후 곧바로 개헌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2단계 정치개혁을 올해 안에 완결할 수 있도록 서둘러 추진하자는 데는 확실한 명분과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 정치를 오늘과 같은 딱한 모양으로 더 방치할 수 없다는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가 이미 조성됐으며 이를 거역하는 정당은 이번 총선에서 준엄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올해 안에 내각제 개헌을 완결해야만 제도적 변화에 대한 정치권의 적응기간을 확보할 수 있다. 반세기에 걸친 대통령제의 관행 속에서 자라난 대통령 지망생들이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는 청와대로의 꿈을 접고 팀워크와 타협으로 정당을 이끄는 총리 후보로 변신하는 데는 3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16대 대통령과 17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거의 동시에 끝나는 2008년 초 내각제로의 순조로운 이월을 보장하려면 올해가 개헌의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팀워크와 타협의 후보 키워야

우리 헌정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내각제 개헌은 무책임한 새 실험이 아니라 원상으로 돌아가는 역사적 복원이라 할 수 있다. 4.19혁명의 결과로 출범한 장면 총리의 내각제 정부가 5.16 군사혁명에 의해 그 짧은 실험의 막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것을 우리 국민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4.19 이후의 혼미한 정치정세가 군사혁명을 초래했다는 논리를 내세워 무작정 내각제를 불안정에 결부시키는 무지는 떨쳐버려야 한다. 지난 40여년간 많은 희생의 대가로 축적한 우리의 민주적 역량에 믿음을 두고 지금의 난국을 돌파할 국민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 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