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있는고향>호박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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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못생긴 여인을 가리켜 호박같다느니,호박꽃도 꽃이냐는 등 다소의 비아냥이 섞인 언사속에 호박과 그 꽃은 무시당해 왔다.심지어 어린 애호박조차 심술궂은 놀부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죄없이 말뚝 박히는 수난을 다반사로 받아왔다.
어린시절에는 누런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인 호박국이 가족들의 영양공급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얄팍히 썰어 실에 꿰어 처마끝에 대롱대롱 매달거나 툇마루 위에 늦가을 햇살과샛바람에 말려 호박떡을 만들 때나 추운 겨울날 통무를 넣고 끓이는 맛깔스런 국의 필수재료였다.잘 마른 호박씨는 착한 아이의간식거리로 입안에 고소한 미각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와 같이 친근하던 호박이 근래에는 건강식품으로 시판되고 있음을 본다.호박죽 외에 호박주스라는 캔음료도 눈에 띈다.고유의전통과 은근한 멋을 사랑하는 가장들이라면 호박차를 만들어 부모님은 물론 아내와 자식들에게 대접하는 즐거움을 갖자.설마 호박차를 마신다고 시대착오적이거나 촌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박차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간단하다.정성과 애정이라는재료 외에 개인의 취향에 맞는 늙은 호박을 구해 먼저 껍질과 속을 제거하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솥이나 냄비 등에 넣고 끓인다.요즘은 물조차 마음 놓고 못마시는 세상이 되었으 나,어떻게든 청량한 물을 구하도록 한다.끓기 시작하면 대추.생강을 넣고호박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은근한 불로 오래 끓인다.소금을 소량 첨가해 다시 한번 센불에서 끓인다.체에 밭치거나 거즈 수건따위로 걸러 기호에 따라 적당량의 꿀 을 가미해 마시면 좋다.
껍질을 벗긴 호박씨를 띄워 마시면 더욱 별미다.
한낮임에도 밖이 어둑하기로 창을 열고 내다 보니 다시금 흰눈이 하늘하늘 내리고 있음이라.이럴때 시루에서 갓 쪄낸 호박떡 먹는 재미를 어디다 견줄 것인가.모락모락 김이 나는 따끈한 백설기 속살에 박힌 달착지근하고 향긋한 호박고지를 빼어먹는 즐거움.떡 한조각 베어 먹고 차한모금 마시고.
「94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손님들에게 내놓으면 더없이 매력적인 한국의 전통차와 먹거리가 될 것이다.책장 한 모서리에 놓여 있는 늙은 호박이 배시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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