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짠돌이 개성상인 ‘거품 없는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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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준 삼정펄프 회장이 3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서울사무소 매장에서 두루마리 휴지 등 제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곳에서 근무하고, 토요일엔 경기도 평택 공장을 찾는다. [양영석 인턴기자]

 이달 초 서울 혜화동 삼정펄프 서울사무소에 방문했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1970,8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사무실 입구에는 세로로 쓴 나무 간판이 걸려 있고, 출입문도 노란색 나무문이었다. 창업주인 전재준 (84) 회장은 섭씨 32도의 찜통 더위를 선풍기 하나로 쫓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에어컨은 겨울에 난방용으로만 쓴다고 했다. 다이얼을 돌리는 브라운관 TV, 40년된 소파, 집에서 쓰던 것을 가져왔다는 옷장 등, 여느 중견기업 사무실과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탁자위에는 화장지 한 우물만 판 회사답게 삼정펄프뿐 아니라 경쟁사에서 나온 두루마리 화장지와 미용 티슈, 키친 타올이 쌓여 있었다. 이 회사는 화장지를 만드는 원지 시장에선 업계 1위(시장점유율 23%)업체다. 회사 전체 매출에서 원지 비중은 70%를 차지하고, 생산된 원지는 화장지 가공업체 100여 곳에 공급한다. 94년 ‘리빙’이라는 브랜드로 화장지 완성품 시장에도 뛰어 들었다.

 ◆개성상인의 짠돌이 경영=개성 출신인 전 회장은 소학교를 마친 뒤 장사판에 뛰어 들었다. ‘참외 껍질이 먹고 싶어서 사달라고 했다가 아버지께 혼났을 정도’였다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해방 후 서울 종로3가에서 종이 도매상을 하다가 61년 부도난 인쇄용지업체를 인수하면서 제조업을 시작했고, 74년에는 경남펄프공업을 인수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전 회장은 “정직과 신용, 근검절약을 제일로 삼는 ‘개성상인’으로 훈련받아 거품을 빼고 실리를 추구하는 경영밖에 모른다”고 했다. “화장지와 종이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에 제지·펄프업을 택하게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절약은 삼정펄프 임직원 모두의 습관이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천정의 형광등 두 개 중 하나는 뺐고, 화장실 불은 항상 꺼져 있다. “들어갈 때 켜고, 나올 때 끄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전 회장은 반문한다. 1년 전기요금 5억원의 5%만 절약해도 2500만원을 아낄 수 있다고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이 회사는 판공비 항목이 없다. 업무를 위해서 쓴 비용은 영수증과 함께 사후 청구할 수 있는데, 손님접대시에도 대개 1인당 5000원을 넘지 않는단다. 전 회장은 “오늘 점심 때 은행 지점장이 찾아와 직원들과 함께 중국집에 가서 짜장 볶음밥을 먹었다”며 “오늘은 큰 잔치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제품도 ‘거품 빼기’의 철학을 보여준다. “휴지는 재활용 할 수 없잖아. 한 번 쓰면 버려지는 것이니 잘 닦이고 버리기 쉬우면 그만이야. 향수 몇 방울 뿌리고, 무늬 그려 넣어 좀 비싸게 팔 수도 있지만, 그렇게는 안 해.” 삼정펄프 제품은 경쟁사 제품에 비해 가격이 절반쯤 된다. 품질이 뒤져서가 아니라 거품을 빼서 싸게 팔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짠돌이 경영인 전 회장도 쓸 때는 쓴다. 생산 공정이나 근무 환경을 위해 필요할 때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최근 평택 공장에 50억원대의 최신 설비를 도입하고 증축하면서 내부 시설을 단장했다. 사회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끼지 않는다. 2003년 당시 시가 300억원의 공장부지를 안양시에 기증했다. 시민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준공식을 지난달 마쳤고, 내년 말 완공될 예정이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시가 50억원대 임야는 성균관대에 기증했다.

 ◆84세 현역=전 회장은 매일 오전 9시 이전에 출근해 ‘풀 타임’으로 근무한다. 자료를 검토하고 업무를 지시하고 보고를 받는다. 3남1녀 중 세째 아들인 전성오 사장과 크고 작은 일을 상의해 결정한다. 퇴근 시간은 직원들보다 한 시간 이른 오후 5시. 매주 토요일에는 평택 공장을 찾아 생산 현장을 점검하고 직원들과 대화한다. 지난해까지 주말마다 골프를 나갈 정도로 건강했는데, 공장에서 넘어져 다리 수술을 받은 뒤로 운동을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꿈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일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도 낭비”라며 “힘이 있을 때까지 일하겠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1980년대 후반 노사 관계가 악화됐을 때를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꼽았다. 당시 3개월간 파업 끝에 회사가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마무리 됐었다. 그는 “사람 대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며 “회사돈을 마음대로 쓰지 않고 이치에 맞게 경영하는 모습을 통해 노사간에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회사가 40여년간 특별한 호황 없이 어린 아이가 크는 것처럼 꾸준히 성장했다”며 “앞으로 100년 넘게 가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020억원. 장기적으로 화장지 원지 비중을 30%로 줄이고 완성품 비율을 70%로 높여 수익성을 높일 계획이다.

 베트남에 서울 여의도 크기의 땅을 임대해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안정적인 목재공급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현영 기자

삼정펄프

▶설립:1961년 (옛 삼덕제지)

▶대표이사:전재준 회장, 전성오 사장

▶본사: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해창리

▶사업장:경기도 평택시, 충남 천안시, 경남 함안군

▶임직원 수:319명 (생산직 238명, 관리직 81명)

▶생산 품목:화장지 원지, 두루마리 휴지, 미용 티슈, 점보롤, 키친타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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