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산과 호수와 별 구경은 덤 … 여유 넘쳤던 제천영화축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제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실은 ‘찍고 왔다’는 게 정직한 표현이죠. 9일 개막식에 맞춰 갔다가 다음날 급한 일이 생겨 부랴부랴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영화는 개막작 한 편밖에 보지 못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청풍호반에서 야외상영을 했거든요. 밤하늘에 내걸린 스크린 뒤편으로 산자락과 호수가 펼쳐지는 풍경이 신선했습니다. 물론 부산영화제도 매년 야외상영을 하는데, 그때는 배경이 도심의 고층 아파트 불빛입니다. 맛이 좀 다르지요.

 그런데 개막작 시작 직후, 뒤쪽에서 누군가 휴대전화를 받았습니다. 영화에 아랑곳없이 통화가 퍽 길게 이어지더군요. 덕분에 ‘검찰’ ‘소송’ 같은 제법 심각한 단어가 제 귀에도 들려 왔습니다. 그 누군가는 다른 관객의 지적을 받고서야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여전히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통화 중인 상태로요. 중요한 일이 진행 중인 모양입니다.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요.

 여느 때라면 꽤 짜증스러운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는 여유로운 마음이 들더군요. 주변 관객들의 너그러운 태도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관객들의 채비가 여느 극장과 다르더군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 위에 휴대용 방석을 깔고, 손에는 더위와 모기를 고루 쫓을 부채를 쥐었더군요. 간식거리로 챙겨온 찐 옥수수도 눈에 띄었습니다. 공식적으로야 음식물 반입 금지지만, 팝콘에 비하면 냄새도 소음도 덜합니다.

 상영 도중 일행을 찾는다며, 먼저 집에 간다며 들고 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다 할 큰소리 없이 끝까지 영화를 즐겼습니다. 개막작 ‘원스’는 길거리 연주자가 주인공인 음악영화입니다. 기타를 치며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던 남자는 동유럽에서 이민 온 여자를 만나 음악과 인생에 대한 열정을 북돋웁니다. 이 여자, 지금은 피아노 살 돈이 없어 동네 악기점에서 가끔 연주하는 걸로 갈증을 푸는 처지지만, 역시나 음악을 사랑합니다. 구구절절한 말보다 노래에 마음을 싣는 이들의 모습은, 앞사람 머리에 가려 자막이 좀 안 보인다 해도 충분히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더군요.

 올 칸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각자에게 자신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유명 감독들이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와 극장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는 내용이지요. 그중 영국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단편이 독특합니다. 모처럼 극장 나들이를 한 아버지와 아들이 매표소에 줄을 섭니다. 무슨 영화를 볼지 망설이는데, 뒤쪽에 줄 선 사람들이 재촉도 하고, 훈수도 둡니다. 액션? 멜로? 결국 이 아버지의 선택은 ‘축구나 보러 갈까’입니다. 어린 아들도 좋다고 따라갑니다. 켄 로치는 정치·사회적으로 뜨거운 영화를 곧잘 만들어온 감독입니다. 그런 그가 ‘영화가 별 거냐’고 하는 겁니다. 올 제천영화제는 14일 폐막했습니다. 일상에 지친 머리를 식히고 싶다면, 내년 이맘때를 기약해야겠습니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