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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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제1부 불타는 바다 탈출(6)명국의 손이 나가 길남의 어깨에얹혔다.이 녀석아,내가 왜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간 말이 뭔데.네 가슴팍에 진 응어리를 모른다고 하겠냐.
명국은 어금니를 물며 고개를 끄덕인다.태복의얼굴이 떠오른다.
피멍이 들어 일그러졌던 얼굴,무릎밑에 막대를 끼워 꿇어앉히고 짓누르던 고문에 다리를 절름거려야 했던 태복이.살아서 돌아가야하네.자네 꼭 그래야 하네.돌아가거든 마포에 가 서 일본사람이하는 포목점을 찾게나.굶어 죽었어도 알 테고… 어디에 가있든,내 식솔이 어느 바닥에서 뭐하고 있는지는 그 일본사람은 알 걸세. 일본사람인데,왜 일본사람에게 자기 식구들 안부를 물으라는지 그때 명국은 태복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속도 쓸개도 없는놈인가.왜놈 손에 이꼴로 산송장이 되면서 일본사람을 찾아가라니.차마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명국은 그때 혼자 그 런 생각을했고,모를 일도 있구나 중얼거렸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던가.사람이 사람같아야 사람이지.왜놈 왜놈 하지만 왜놈도 사람나름.내 이제 일본이라면 죽어도 이를 갈아마시며 죽는다만 그러나,그러나 말일세 그 일본사람은 사람이었다네.일본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네.
태복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러나 명국은 고개를 저었다.그 말을 길남이에게 전할 마음도 아니었다.길남의 어깨에 얹은 손에힘을 주면서 명국이 일어났다.바람 때문인가.어둠 속으로 모습도보이지 않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면서 날아갔다 .
『일어나 녀석아.저쪽에나 나갔다가….』 길남을 내려다보며 명국이 말을 이었다.
『그랬다가 들어가자.밤늦게 다닌다고 또 무슨 소리 들을라.』길남이 일어서며 말했다.
『알 것 같네요.어저씨가 왜 우리 아버지랑 함께 여길 떠나지않았던지.』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둘은 천천히 방파제를 따라 걸어나갔다.
『그렇게 겁나는 게 많은데 어떻게 여길 떠날 엄두를 내셨겠어요.이놈이 야 하고 불러도 그저 예예,저놈이 오이 이리 와 봐하기만 해도 그저 예예.』 『네 말이 맞다.난 간도 작고,쓸개도 작고,겨우 명치끝이 발랑발랑하면서 사는 것만도 고마운 그런사람이니까.』 명국이 어깨를 흔들며 헛웃음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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