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마저 논공행상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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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사가 만사」라고 강조해온 김영삼대통령의 이번 차관급 인사는 대체로 「전」(전문성)보다는 「홍」(충성심)을 택한 결과로 보인다. 24명 가운데 한두명을 빼면 내부승진이라기 보다는 「낙하산 인사」라는 점이 그런 시각을 갖게 한다. 언론에서 이번 인사를 「상도동 축제」로 평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국정의 총책임을 져야 하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논공행상은 필요악인지 모른다. 책임정치를 위해 뜻이 맞는 동지를 전진배치하고 행정조직을 소신에 따라 운용하겠다는 것을 나무라기만 할 수는 없다. 이는 미국같은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 나라에서는 지역행정책임자는 주민의 직접선거로 결정하게 되고,국무위원이나 차관급의 정무직은 국민의 심판을 거친 의회 의원이나 의회청문 등을 통해 충분한 검증절차를 거친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
더구나 장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차관급까지를 전문성보다 충성심 기준으로 기용한다면 행정의 질과 효율성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개방화·국제화시대를 맞으면서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초미의 현안과 씨름하고 있다. 국가경쟁력은 경제력으로 나타나는 것이긴 하지만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것은 행정의 높은 질과 효율없이 기대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번 인사의 결과가 우선 다음 세가지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씻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첫째는 정가에 이미 파다하게 떠돌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사전 포석이란 지적이다. 질좋고 효율적인 행정서비스 보다는 눈앞의 단체장선거 전략으로 행정 일선책임자를 골랐다면 큰 오산이다. 사전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시·도지사가 움직이고 장·차관이 행정처리를 할 때 그 정부를 믿고 따를 의식수준은 우리 국민이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칠 수 없는 또다른 우려는 행정의 전문성 외면이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정치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행정의 내용이 복잡해져 간다. 정치인보다 행정전문가만이 판단할 수 있고,전문가라야 해낼 수 있는 내용의 행정영역이 넓어져 가는데도 정치적 고려만으로 실무행정의 책임자인 차관까지 뽑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끝으로 공직자의 사기저하 우려다. 차관은 공무원의 꽃으로 생각돼왔다. 정권에 흔들리지 않고 국가의 해당분야 정책기초를 붙들어야 하는 직업공무원으로 30여년을 지낸뒤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차관이었다. 선진외국의 경우 많은 나라에서 그런 앞길이 보장되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특정정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위해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그런데 그 자리마저 집권의 논공행상으로 빼앗길 때 과연 공무원들이 의욕을 잃지 않고 국가이익에 신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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