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환희와좌절>10.여자탁구 이유성감독 운명의 5세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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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93년 5월22일의 낮과 밤.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한창인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내 생애 최대의 좌절과 환희가 차례로 교차했다.
이날 낮 36세의 최연소 나이로 여자대표팀 감독의 중책을 맡았던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자괴감에 빠졌다.
내 스스로 주장해 관철시킨 玄靜和(한국화장품)-朴海晶(제일모직)조가 어이없게 북한의 위복순-안희숙조에 2-1로 패해 16강전에서 탈락하고 만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그러나「피노키오」현정화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단식 8강전에서 중국의 난적 천쯔허를 3-0으로 가볍게 일축,준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짙은 어둠이 내린뒤에 치러진 4강전 상대는 루마니아의 바데스쿠. 유럽선수와는 누구와 붙어도 자신있고,특히 양핸드의 돌출러버를 사용하는 바데스쿠는 지난 91지바대회에서 이겨본바 있기에내심 큰 걱정을 안했다.
몸쪽보다 허점이 많은 바깥쪽에 대한 집중공략을 주문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玄이 첫세트를 힘 한번 못쓰고 내주는 것이 아닌가.
신들린듯 퍼부어대는 바데스쿠의 좌우 연타에 속수무책이었다.
결코 玄이 못해서가 아니었다.
2세트에 나서기전 1분여의 짧은 휴식기간,『방법이 없으니 조금 무리해 공갈타를 때려보자』고 제의했다.
공갈타란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먼저 강타를 날리는 것.
이게 먹혀들어 접전끝에 2-2 타이를 이뤄 운명의 마지막 5세트에 들어섰다.
9-6,10-6으로 밀리며 玄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지난 89년11월부터 지도해온 탓에 자포자기에 빠져가는 玄의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다급했다.
『정화야,오른쪽으로 몰아붙여.』아니나 다를까 퇴장명령이 잇따랐다. 벤치에서는 경기중 절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순간 시간을 벌어보자는 생각이 번뜩였다.
다가선 심판에게 우물쭈물 말도 붙이고 약 2분간을 버텼다.
바데스쿠의 리듬이 깨진탓인지 玄이 10-9까지 추격했다.퇴장당한 나는 관중석에 자리했는데 공교롭게도 1백50여 루마니아 응원단속에 파묻혔다.
남자팀감독인 문수(姜文樹)형이 옆자리에 와 안정을 주었다.스코어는 19-19.
미신 같지만 나의 혼을 玄의 타구에 실리게한다는 소박한 일념에서 玄이 스매싱할 때마다 숨을 멈췄다.
결과는 22-20.
玄의 승리였다.
천신만고의 벽을 넘어선 玄에게 이미 우승티킷이 쥐어진 것과 다름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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