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글 뒤에 숨은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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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뒤에 숨은 글/김병익 지음, 문학동네, 1만원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상임고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병익(66.사진)씨가 갑년을 전후한 엇비슷한 시기에 발표했던 자전적인 글들을 모은 산문집 '글 뒤에 숨은 글'을 출간했다.

김씨의 자전적 기록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역시 김씨가 문학과지성사 설립 등을 통해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출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왔기 때문이다. '글 뒤에…'을 통해 김씨는 10년 가까운 신문사 문학.출판기자 생활, 문학과지성사 설립과 경영, 문학평론가로서의 활동 등 공적인 부분은 물론 그 뒤에 가려진 사적인 모습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김씨는 세 부분으로 나뉜 책의 첫 부분 '생각 뒤에 숨은 생각'에서 첫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통념적인 것을 되짚어보며 당연한 것을 되풀이해 묻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요약되는 사유의 습성을 체득하게 된 과정을 털어놓는다. 김씨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스스로 책임지거나 앞장설 것을 유보당하다 보니 수줍음 타는 소년이 됐고, 소동파의 '적벽부'를 줄줄 외우던 중학교 동급생부터 대학 1학년 때 시인으로 데뷔한 평생지기 황동규까지, 경쟁해 볼 생각이 들지 않는 뛰어난 친구들을 만나면서 수석보다는 차하로 만족하게 됐다고 밝힌다.

자신의 주장을 펴기보다 남의 지식과 의견으로 사유의 빈자리를 채우는 입장이었던 김씨가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꼼꼼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했을 것이다. 김씨는 균형감각을 갖출 수 있었고 고집없는 열린 마음을 지녔다는 인상을 주변에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분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오늘이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겸손 때문이었다는 김씨의 고백은 신선하고, 뒤이어 전개되는 김씨의 회고담에 신뢰감을 준다.

두번째 부분인 '말 뒤에 숨은 말'에서는 술을 전혀 못하지만 담배와 커피는 끔찍히 즐기고, 노래 부르는 자리는 조바심이 나서 슬그머니 피해버리는 대신 만년 3급인 바둑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김씨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게 된다. 김씨는 실존주의와 종교적 회의에 빠져 고통스러웠던 젊은날의 고뇌를 밝히고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합창반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공인으로서 김씨의 발자취는 세번째 부분 '책 뒤에 숨은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문사 문화부 일에 재미를 붙여 "신문 문화면이 문화인이나 문화행사, 문화인들의 투고의 '사회자' 구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김병익은 문단.학계를 스스로 취재해 보도한 문화면의 '사건기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일, 김현.김치수.김주연 등 문학과지성사를 공동 설립한 이른바 4K 멤버들을 만나게 된 과정, 기자협회장을 맡아 한국의 언론자유운동을 해외에 알리려다 발각돼 남산에 끌려갔던 일,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 서슬 시퍼렇던 권력의 검열을 인문학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통해 피해간 일 등이 소개된다.

김씨의 지난날이 가슴 뭉클한 이유는 젊은 시절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고뇌.방황이나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이 부과한 시대적 억압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정직하게 고민하며 꿋꿋하게 맞선 김씨의 경우가 하나의 모범사례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의 뒷부분은 70~80년대 한국 출판계가 걸어온 길이면서 독재 정권에 맞선 지성인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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