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개방 연극(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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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쌀개방 논의를 보면 마치 거대한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이젠 일반 시민들도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개방 결정이 임박했다는 체념과 확신이 굳어가는데 수많은 당국자·정치인들은 연기를 잘도 해내고 있다. 국회에서 『쌀개방 문제를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농림수산부장관은 『검토한 적도 없고,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은 바도 없다』고 잡아뗀다. 못믿어 하는 의원들의 거듭된 추궁에 장관은 『내이름이 믿을 신,갈 행인데 내 말을 믿어달라』고 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쌀개방 문제가 논의됐느냐의 여부에 대해 청와대 당국은 『쌀 얘기는 없었다』고 했으나 외무장관은 국회에서 『쌀얘기가 한마디 언급되긴 했으나 그것이 미국의 요구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실은 개방으로 가고 있음이 확연한데도 근엄한 표정과 진지한 어조로 『일국의 국무위원의 말이니 믿어달라』고 하고 『절대 아니다』고 말한다. 연극보다는 기분이 안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쌀개방 문제는 기묘하게도 「개방 절대불가」 소리만 있고 「개발 불가피」 소리는 전혀 없는 가운데 개방으로 가고 있다. 정부는 아직껏 공식적으로는 「검토」 한번 한 일이 없고 여전히 「절대불가」인데 개방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연극을 보는 관객은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는 좋은데 연극이 끝날 때 저 배우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다. 마침내는 「검토」를 했다고 해야 하고 개방불가피도 털어놓아야 할텐데 그땐 어떤 표정과 어조로 그런 말을 할까. 대통령까지도 선거공약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다』고 했으니 그 말 뒷감당은 어떻게 될까. 하기야 10년 유예 관세화를 한다면 실제 개방은 임기후가 되니까 공약은 지킨 셈이라고 하면 그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가대사는 당장의 비난이나 인기하락을 두려워해서는 제대로 추진될 수 없는 법이다. 득을 봐도 국민이 보고,손해를 봐도 국민이 보는 것인데 그 국민을 따돌리고 연기만으로 국면을 미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미리 준비하고 국민을 설득해 대가를 최소화하고 기회를 극대화하는 것이 정도다.
연극은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고 연기는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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