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훈령」 왜 나오게 됐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 특보­임 전 차관/강온 갈등서 비롯/이 특보/“북측 협상은 전략용”… 관계급진전 제동/임 차관/“회담경험 내가 많다” 실리 얻는데 주안/대북관 차이 뚜렷… 공명경쟁도 한몫
청와대의 훈령 조작의혹 사건은 두개의 「훈령」이 나온 이유와 그것의 조작­묵살·고의 지연여부가 핵심쟁점이나 그 이면에는 당시 남북 고위급회담의 쌍두마차 이동복 안기부장특보와 임동원 통일원차관간의 갈등과 공명심 경쟁이 숨어 있다.
당시 우리측 대표단의 정치분과위원장(이 특보)과 교류협력분과위원장(임 차관)을 맡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회담 관계자들은 대북협상에서의 「프로­아마론」을 공공연히 말해온 이 특보의 임 차관에 대한 불신이 결국 훈령조작 의혹을 불렀다고 입을 모은다.
안기부가 서울과 평양 상황실의 통신수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점도 의혹사건의 객관적 토양이 됐음은 물론이다.
우선 이 특보와 임 차관의 갈등이 두사람의 판이한 대북관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많다.
이 특보는 70년대 남북 조절위원회 대변인,80년대 초대 남북회담 사무국장을 맡다가 91년 제3차 고위급회담부터 남북대화에 복귀한 대북통.
그의 대북관은 한마디로 「북한은 대남 혁명의 공작기지이며,따라서 북한의 대화·협상은 대남전략의 일부분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특보의 이같은 대북관은 실제 협상과정에서 북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예컨대 정치분과위 북측 맞수인 백남준 조평통 서기국장이 『팀스피리트훈련은 핵전쟁연습』이라고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으레 『자 이제 끝났소』로 시작,특유의 달변으로 상대방을 쏘아붙이곤 했다는 것이 회담 관계자들 얘기다. 말하자면 언제나 강한 논리로 북측 상대역을 제압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임 차관은 육군소장 출신의 군축문제 전문가로 나이지리아 대사·외교안보 연구원장을 거쳐 92년 1월 통일원차관이 됐다.
그는 90년 9월의 제1차 고위급회담부터 줄곧 대표 및 실무접촉 대표로 활약해온 90년대 대화통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그는 이 특보의 「프로­아마론」에 대해 『프로,아마구분은 말도 안된다. 내가 회담경험이 가장 많다』며 응수해왔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그의 대북관은 「북한이 대남 혁명전략을 포기하지는 않았다손치더라도 소련 및 동구 붕괴이후 분명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은 껍데기에 불과한 만큼 남북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대북관은 협상과정에서 북측 상대역인 김정우 대외경제위 부위원장에게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실리」에 주안점을 둔데서 잘 나타났다.
이 때문에 회담 사후 평가회의때 이 특보로부터 곧잘 「북측 대표의 이말을 짚었어야 했다」고 지적을 당하곤 했다.
또다른 측면에서 이 특보는 임 차관이 남북 정상회담에 연연해 남북관계를 급진전시키려는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일부에선 또 이 특보가 임 차관의 반대에도 불구,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타결을 서두르는 입장에 섰던 점에 비춰 훈령사건에는 둘간의 대북관 차이 외에 공명심 경쟁도 얽혀 있다고 말했다.
한 회담 관계자는 『이 특보·임 차관의 대북관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제도의 미비와 수석대표의 능동적인 조정역할이 없었던 점이 결국 대북협상의 분란을 가져왔다』고 말했다.<오영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