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얼어죽어가는 보스니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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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신병 환자들이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알몸으로 눈위를 걸어다니고,환자들이 불기도 없는 병실에서 오돌오돌 떨며 밤을 지샌다.수술실에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 제대로 수술도 받지 못한다. 빠른 시일내에 난방이 재개되지 않으면 사망자가 줄을 이을 것이다.식량.연료.옷등 생필품도 바닥난지 오래다.』 내전에휩싸여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겨울이 닥쳐 많은 사람들이얼어죽어 가고 있다고 외신들은 이 곳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세계의 관심은 온통 亞太경제협력(APEC)정상회담과 北美자유무역협정(NAFTA)에 쏠려 있을뿐 지구의 또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원시적 고통」과 살육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관심을기울여주지 않는다.
내전 발발 20여개월만에 무려 20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이 지역 민간인 2백70만명이 이번에는「엎친데 덮친 격」으로 잔인한 겨울과도 싸워야 할 판이다.보스니아는 겨울올림픽을 유치할만큼 혹한으로 유명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계에 의해 봉쇄돼 있는 수도 사라예보 주민 38만명의형편은 더욱 열악하다.중부 보스니아의 유일한 생명줄이던 유엔 구호물자가 지난달 26일부터 한달간 중단된 적도 있었다.유엔난민구호위원회 소속 덴마크 운전사가 보스니아 정부 군측의 총격으로 숨졌다는 이유 하나로.
이 조치로 인해 사라예보지역의 경우 1주일에 식량.약품.연료등 모두 2천8백여t의 구호물자가 필요하나 1천5백여t만이 空輸에 의해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의 이면에는 정치적 책략이 개입돼 있다고 보스니아사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중부 보스니아는 회교계가 주도하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거의 장악하고 있는 지역으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보스니아 대통령이 지난 9월말 세르비아 계측에 추가적인 영토 양보를 주장하며 유엔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거부해 보스니아 사태 해결이 난관에 부닥치자 이에대한 무언의 압력이라는것이다. 이뿐아니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유럽공동체(EC)특사인 데이비드 오웬卿의 지시아래 프랑스유엔평화유지군도 구호물자를 악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측이 보스니아 정부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피크레트 아드비치가 이끄는 비하크 지역에 대해 비밀 파이프라인을 설치,상당량의 구호물자를 이들에게 은밀히 공급하고 있다고 유엔과 EC관리들은 말한다.
물론 구호활동지연의 1차책임은 내전당사자인 회교系.세르비아系.크로아티아系에 있다.
이들이 구호물자 수송로를 막거나 파괴하는등 이전투구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지난 19일 구호물자 공급을 방해하지않기로 합의,24일부터 재개될 예정이지만 지방지도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서방측이 무력으로 보급통로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구호활동을 둘러싼「음모」는 이들 당사자들의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다.내전지역에 대한 구호활동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치적 목적에 이용돼서는 안되는 인도주의차원의 활동이다.굶주림과추위에 떠는 난민들에게 한번쯤 눈을 돌리자.
「하나의 지구촌」이 강조되는 시점에서 지구촌으로부터 버림받은보스니아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더욱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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