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캠퍼스(선진교육개혁: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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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성적 나쁘면 자동탈락”/과제물 홍수… 과락 두번하면 출과/파리대 영문과 80%가 유급/대학가면 우리 현실과 딴판
『2학년 첫 학기를 조심하라.』
미국 MIT대 학생들은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1학년때 성적은 유급여부만 가리는 정도지만 2학년 첫 학기가 끝나면서 처음 A·B·C·D로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들중 한 두명은 자신의 성적에 실망해 자살하는 사태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평소 수재란 소리만 들어온 학생이 밤새워 공부하고도 C학점을 받은 충격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이같은 사례는 다른 이름난 대학에도 얼마든지 있다.
중·고교때는 더디다 싶게 기초만 잡아주던 미국교육은 대학에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와는 정반대다. MIT대 전기공학과 2학년 마이클군(19). 아틀랜타에서 좀 떨어진 오스텔의 공립고교를 수석졸업한 그의 요즈음 유일한 바람은 「새벽 3시이전 잠자리에 들어보는 것」이다.
『대학원생이 되면 생활이 안정돼 새벽 1시쯤 잠잘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MIT대의 일상적 분위기다.
마이클군이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모두 4과목. 교양과목인 「음악개론」과 「디지틀 회로 디자인」을 비롯,「일렉트로닉 디바이스」 「확률·통계」 등 전공 3과목이다. 수업량만 따지자면 한국 대학생들과 다를바 없다.
그러나 매주 봇물터지듯 끊임없이 쏟아지는 전공과제물을 보면 두나라 대학생들의 차이는 확연해진다. 마이클군이 수강하는 3과목의 교수들은 매주 배운 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어려운 문제들을 과제로 내준다.
『이 과제는 프라블럼 세트(Problem Set)라고 불리죠. 3과목 과제에 매일 매달리다보면 1주일이 정신없이 지나가요. 주중엔 공부외에 다른 일은 상상도 못해요.』
중간에 퀴즈(수시로 보는 간단한 시험)라도 겹치는 날이면 침대에 누워 보지도 못한다. 그는 요즈음 「디지틀 회로 디자인」이란 실험과목 때문에 종종 밤을 새운다. 트락셀 교수가 지도하는 이 과목은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실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은 「골드 마인」(금광)이라고 불린다. 열심히 파고드는 사람은 그곳에 묻혀있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혹독한 대학생활은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본 대학에선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하는 과정을 「마의 터널」이라고 부른다. 학점을 취득하지 못해 다른과로 옮기거나 아예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 「탈락자」들이 50%나 생겨나기 때문이다. 방학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 대학의 법학과는 방학전에 다음학기 연습 과제물을 내주는데 개강때 이 과제를 제출하고 통과해야만 그 다음단계 과목을 들을 수 있다.
이 대학 유학생 신모씨의 경험담. 『2학년때 민법사례들을 정리하는데 꼬박 4∼6주간 걸렸죠.
이 과제를 마쳐야만 다음단계 강의를 듣는 것은 물론 법학 국가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겨요.』
아헨공대에선 4년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최소한 2개의 연구프로젝트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데 프로젝트당 평균 1년 정도씩 걸린다. 졸업에 6∼7년이 걸리는 것은 보통이다.
프랑스 파리대학의 탈락률도 악명이 높다. 파리 10대학 인문대는 2학년으로 올라갈 때 50% 정도의 학생이 중도 탈락한다. 특히 영문학과는 제때 2학년을 마치지 못한 사람이 80%에 달한다. 시험에서 한번의 탈락은 인정되지만 두번일 경우엔 출과된다. 전공이 맞지 않으니 다른 전공을 택하거나 학교를 떠나란 뜻이다. 『올 졸업자가 13명이었어요. 입학할땐 40명이었는데….』 파리 10대학 대학원 경제학과에 재학중인 황모씨의 설명이다.
파리대학들은 아예 성적을 공개한다. 학생들로부터 『잔인하다』는 비난을 듣지만 학기마다 강의실 복도엔 학생들의 성적이 과목별로 나붙는다. 학생들간의 경쟁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다.
입학정원이 거의 없는 유럽의 대학은 입학은 얼마든지 자유롭지만 졸업한 것은 「낙타 바늘구멍」인 것이다. 『학교에서 솎아내지 않으면 사회에서 탈락된다.』 유럽의 대학들이 잔인한 방법을 택하는 이유다.
이런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대학은 「해방」 공간이다. 특히 신입생들은 입시공부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데 최소한 1년은 마음껏 쓴다. 부모도,교수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대학가서 마음껏 놀아라.』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입시준비로 지친 수험생 자녀에게 흔히 하는 위로다.
대학에 등록금을 낸 이상 「강의듣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한국 대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교수들에게 무책임한 휴강이나 결강을 보충해달라고 요구하기는 커녕 아이들처럼 좋아하는게 우리 대학생들이다. 걸핏하면 자해에 불과한 수업거부를 강력한 무기인양 내세운다.
우리 대학생들은 국경일·수학여행·졸업여행 등 각종 행사로 학기당 16주가 돼야 하는 수업일수를 못채워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대학은 의무를 내팽겨쳐두고 있는 셈이다.
캠퍼스는 걸핏하면 외부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고,총장실이고 어디고 학생들이 마구 점령해 난리를 쳐도 이를 막고 꾸짖는 질서조차 없다. 대학생들은 저마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예비전사들이다. 대학은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국제경쟁에서 우수한 두뇌를 강하게 길러내지 않으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고교때는 사지선다형 시험으로 창의력을 막고,대학땐 빈둥빈둥 놀게해 무한한 가능성의 젊고 우수한 자질을 스스로 썩이고 있는 망국적인 교육체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실력경쟁을 본질로 하지 않고 창조적 학문이 없는 대학은 죽은 대학이나 마찬가지다.
◎한국대학생 학습량/주당 한강좌 강의시간 미·영 절반수준/전공독서·과제·도서관이용 모두 뒤져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공부량은 선진국들과 비교해 어느정도 수준일까.
88년 12월 서울대 황정규교수 등 6명의 연구팀이 작성한 「대학교수 학습체제 분석과 학습량 적정화 방안연구」란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학습량은 선진국 학생들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강좌를 위한 주당 평균 학습시간은 한국의 3.6시간. 이는 5.4시간인 미국이나 6.4시간인 영국 학생들의 절반정도다. 학기당 전공 독서량도 일본·미국·프랑스의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보다 3배나 더 많다.
강좌당 제출하는 리포트도 한국은 평균 2.0건으로 4.1건인 미국과 3.9건인 프랑스에 비하면 절반에 그치고 있다. 또 주당 도서관 이용횟수에 있어서는 한국이 2.5회로 4.4회인 미국과 4.6회인 프랑스,3.9회인 영국에 비해 뒤쳐지고 있다. 이같은 수치는 학습량의 단순시간 비교에 불과하다. 집중도·효율을 뒷받침할 제반시설의 차이 등을 감안하면 공부의 질과 내용면에서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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