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증후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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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8월에 어느 대학교수가 수도권지역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이 지역 주민들의 하루 TV 시청시간이 평균 3시간반∼5시간에 이르더라는 것이다. 봉급생활자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일하고 잠자고 출퇴근하는 시간을 빼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의 대부분을 TV 수상기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뚜렷하게 여가를 보내는 방법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 대부분이 공부하다 짬이 나면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플라톤이나 렘브란트 같은 고전이 높이 평가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를 대신하는 것은 직접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신문에서 읽는 범죄나 살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교양의 지위상징(Status Symbol)화」라고 했다.
성인들이 술집에 가서 최신 유행가를 한곡씩 유창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전파매체 덕분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디 어른뿐인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느 가수의 헤어스타일,어느 탤런트의 의상이 유행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텔레비전을 모방하고 텔레비전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텔레비전 모방현상이 엉뚱한데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인기가 높았던 「파일럿」이란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요즘 항공대학의 입시지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해서 화제다. 드라마가 방영중일 때도 관련학교와 학원에 전화문의가 쇄도했었다고 한다. 파일럿 생활을 미화시킨 한편의 TV 드라마가 학생들의 장래진로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진로문제에 관해 터놓고 상의해줄 사람이 없는 학생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특정직업을 미화시킨 가상의 드라마를 보고 여기에 매혹돼 평생을 좌우하는 진로를 정한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가상의 예술작품 속에서는 범죄마저도 미화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우리 기성세대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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