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9단」도 나와야 한다(송진혁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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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객선 참사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확인되면서 지금이 분명 난국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공직사회는 나사가 풀려 일선 공무원이 움직이지 않는 「복지부동」 상태이고 경제는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와 노동1,2호 미사일은 계속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으며,러시아의 핵폐기물은 우리의 동해를 위협하고 있다. 다른 용들은 계속 뻗어가는데 우리는 엔고 호기마저 못살리고 있고 세계1,2위를 다투는 교통사고·불친절로 엉뚱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돈은 없는데 사회기반시설 확충은 급하고 냉해를 당한 농민 마음이 추곡수매가로 상하지 않을까도 걱정이다.
○아직 못보인 정책능력
이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난제요,골칫덩어리요,해결이 간단치 않은 문제 투성이다.
국가경영은 세력을 규합·확대하고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만으로는 안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의 우선순위와 완급을 정하고 해결공식을 제시하고 그리하여 더 부강한 나라,더 질높은 국민의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정책능력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을 흔히 정치 9단이라고 한다. 그만큼 정치에 있어서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집권초기에 전광석화처럼 군개혁을 단행하는 솜씨나 야당까지도 개혁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정치역량은 탄복할만하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은 당연히 그 나라의 가장 영향력 큰 인물이겠지만 지금 김 대통령은 강력해도 보통 강력한 대통령이 아니다.
그러나 집권한지 8개월이 된 지금까지 김 정부가 보여주지 못한 것은 바로 정책능력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 이하 내각과 많은 공직자들이 열심히 하긴 하는 것 같은데도 웬일인지 여러가지 문제가 안풀리고 상황개선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에서,한­약분쟁에서,북한 핵문제 등 도처에서 정부능력이 의심받고 위태위태한 느낌을 주어왔다. 특히 여객선 참사로 공직사회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는 것 같다. 이 시기를 난국으로 느끼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런 정부능력문제가 아닌가 한다.
○정책프로팀이 나와야
지금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는 하나같이 고도의 전문지식과 국제적 감각,세상사에 대한 풍부한 경험,입체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나 핵문제와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교통·교육문제 등 무엇 하나 상식적 대처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얼마전 과소비와 허례를 막기 위해 잘 한다고 한 화한 안보내기운동이 꽃재배 농민의 시위를 부르고,호화 유흥업소를 결딴내자 갈곳 없어진 그 쪽의 우범성 인구들로 인해 범죄가 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선적으로,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기엔 세상사는 이처럼 복잡한 것이다.
단순한 열정이나 순수한 동기 또는 민주화투쟁 경력만으로는 국가경영이 안되는 것이다. 또 이런 문제들은 대통령 한분이 열심히 한다고 감당할 수 있는 문제들도 아니다. 고도의 전문지식과 풍부한 경험,노련한 행정능력 등을 갖춘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 앉아 열심히 챙기고 밤낮없이 씨름해야 할 문제들이다.
대통령은 바로 그런 인물들을 찾아 알맞은 자리에 배치하고 소신껏 일할 여건을 보장해주고 자기는 고소대처에서 거시적으로 판단,결단을 내리는 입장이 돼야 한다. 그래서 상황이 개선되고 실적이 오르면 그것이 누구의 아이디어로 누가 추진했든 모두 대통령의 업적이요 공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싫든 좋든 우리가 해답을 내야 할 문제들은 밀어닥치고 있다. 하루가 늦으면 하루만의 손해가 아니고,1년을 늦추면 장차 몇년의 손해를 볼지 모르는 문제들도 많다. 해답의 방향이 몇도만 틀려도 엄청난 대가를 물어야 할 일도 많다. 아마추어한테 맡길 수 없는 일들이다. 모두 막대한 돈과 인력과 전문적 판단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문제들이다. 경제가 그렇고,핵이 그렇고,교육·환경·교통문제 등 안그런게 없다.
정치는 이미 김 대통령이 9단이니까 이젠 정부에 「정책 9단」도 나와야겠다. 정책 9단이 그 밑에 정책 8단·7단 등 프로들을 거느리고 하나의 팀이 되어 오늘의 난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지금 보면 여전히 좁은 의미의 정치에만 종사해온 정치인들이 중요인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정책프로들이 득세하고 무대를 주름잡는 시절이 돼야겠다.
○일할 권한과 책임 중요
정책프로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도 주어져야 마땅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여러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가 처음 고 김재익씨에게 경제수석비서관을 맡기는 자리에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말은 음미할만 하다. 훌륭한 왕이나 대통령 밑에는 명재상이 나와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을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김 정부도 이제는 유능한 정책 9단을 발탁해 그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할 팀을 짜는게 옳은 것 같다. 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 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한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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