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여자의4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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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3.가을 다음해 구월(11)은서는 유혜란이 노태수가 아니라 노태수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때의 유혜란의 얼굴에 번져있던 생기가 떠올라 장난스럽게 손을 모으고 비는 시늉의 최피디를 보며 은서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볼께요.』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는데도 최피디는 그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지 은서씨밖에 없다니까,하면서 자기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건너가는 걸 보며 은서는 제작실을 나왔다.
그저께,유혜란은 은서에게 와서 이 행방불명에 대해 귀띔을 했었다.나,없어질거거든요.그가 문경의 어느 폐교를 찍으러 간다는정보를 입수했어요.그 폐교에 들락거리는 산짐승이 있는데 최근에그 근처에서 크낙새를 봤다는 사람이 있대요.크 낙새가 얼마나 웃기는 새인지 알아요? 우리나라에서만 서식하는데 사람 접근을 아주 싫어하는 고고한 새래요.그런데 4년째 어디에도 나타나질 않는데 문경 그 폐교에서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나 봐요.폐교도 찍고 크낙새도 기다려봐서 찍을 작정 인가 봐요.나도 몰래 따라갈 거예요.열흘만 투자하겠어요.열흘 안에 그 사람 마음 속에 나를 들여놓게 할 거라구요.그런데 일이 문제네요.내가 사라지면우리 최피디 골탕먹을거야… 일은 다했는데…우리 최피디가 원고 부탁을 누구한테 할지… 나 때문에 누군가 애쓰겠네.
유혜란이 직접 은서 보고 은서씨가 대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은서는 그때 유혜란의 말 뜻을 알아듣고는 아휴,나는 못해요.처음부터 관여한 일도 원고 쓰려면 진땀 나는데… 나는 못해,하며 손을 내저었다.그러면서도 은서는 유혜란을 향해 눈을 흘겼었다.못한다고는 했지만 유혜란이 그렇게 넌지시 은서에게 자신의 행방불명에 대해 귀띔을 할 때는 유혜란 자신이 없을 때 최피디가 원고 부탁을 할 사람은 은서라는 걸 알고 있었고,그러기에 은서가 거절하지 말고 해달라는 뜻이라는 걸 은서는 알았다.유혜란은 멋쩍게 웃으면서 내 일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이 강렬한 인상을 일 때문에 망치고 싶진 않다구요,했다.
유혜란이 일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강렬한 인상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은서는 마음이 쓰라렸다.문득 나는,무엇을 피해 이토록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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