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 부도율/실명경제 흐름 척도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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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세제조·유통업체 빠져/지표만 집착… 현실과 거리/중기업계/“전체기업 실상으로 간주해선 곤란” 한은
실명제 실시이후 정부가 정책 입안과정에서 실물경제를 판단하는 주요지표로 사용하고 있는 어음부도율에 대해 중소기업계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지표에 매달려 실명경제상황을 너무 낙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어음부도율에는 현재 가장 어려운 영세업체들의 휴폐업통계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어서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 등이 문제제기의 주요내용이다.
어음부도율은 어음교환소에서 거래되는 어음중 부도가 난 어음의 총액을 전체 어음거래금액으로 나눈 것으로 한국은행측이 어음교환소의 협조를 얻어 매일 발표하고 있다.
지난 20일 현재 9월 평균 어음부도율은 0.06%로 실명제가 발표된 지난달의 0.07%에 비해 다소 떨어져 있는 상태. 최근들어 경제기획원·재무부 등 정부당국이 『예상보다 중소기업들의 경영상태가 크게 악화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심각한 상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주요근거도 바로 어음부도율이다.
하지만 중소기업계는 『어음부도율은 은행에 당좌를 개설할 만큼은 되는 중견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지,요즘은 실명제로 가장 타격을 받는 영세 제조·유통업체들의 휴폐업·도산수치가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현재 발표되는 어음부도율은 금융결제원 산하 전국 47개 어음교환소중 한은의 지점이 설치돼있는 15개 주요도시의 어음교환소에서 나타나는 부도금액만으로 잠정집계하는 것이어서 나머지 지역의 상태가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점도 있다.
부도율과 함께 발표되는 부도업체수와 관련,정부가 전산미비 등을 이유로 서울지역의 부도업체수만 계속 발표하는 것도 현 실물경제 실정과는 동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높다.
중소기협중앙회 김정수 조사부장은 『현재 애로상담이나 문의전화 내용을 분석해보면 건자재·의류 등의 영세제조업체,유통업체를 중심으로 휴폐업업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며 『전반적인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음부도율에 무게를 실어 경제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실제로 8천여개의 점포,도매상이 밀집해있는 남대문시장의 관계자는 『실명제이후 휴폐업 업체가 속출,현재 하이패션 등 주요 의류상가의 경우 10% 정도가 문을 닫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각종 플래스틱제품을 제조하는 중소업체를 대상으로 원료를 공급하고 있는 H화학측은 『실명제 실시이후 공급대상 업체들중 문을 닫은 업체들이 평소보다 세배이상 늘어났다』며 『문을 닫을 때는 부도가 나는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휴폐업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어서 수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측은 어음부도율에 대한 중소기업계의 이같은 이의제기에 대해 『어음부도율의 집계·분석이 불충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정부측이 이를 전체기업의 실정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고 밝혔다.
현재 국세청에 등록된 부가세 사업자는 총 2백10만명이며 이중 업체는 4만여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엄청난 수치에도 불구,경영상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셈이다. 조우현 경실련 정책위원장(숭실대교수·경제학)은 『진단을 정확히 해야 올바른 치료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현재 기업들의 정확한 실태 파악은 어느때보다 중요하다』며 『정부는 적절하지 않은 어음부도율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표를 시급히 확충·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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