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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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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집에 돌아오니까 뜻밖에도 다니엘 아저씨가 보내온 화환이 놓여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백장미 다발이었다. 막딸 아줌마는 내가 좋아하는 잡채와 된장국을 끓여 놓았고 엄마가 시장에서 사온 회도 놓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식욕이 없었고 그저 자고 싶었다. 둥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식사가 끝나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런 둥빈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 위로 짙은 그늘이 덮였다.

“남자 애들 사춘기 요란해요. 다들 겪는 거야….”

막딸 아줌마가 엄마의 표정을 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 먹고 우리 식구 모두 노래방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위녕 시험 끝나니까 둥빈이가 시작하네…. 둥빈이가 끝나고 나면 제제가 그러겠지…. 그리고 그것도 끝나고 나면 나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테고.”

엄마가 말을 하자 제제가 납작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우리 진짜 할머니는 어떻게 해?”

우리 가족은 제제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엄마는 제제 때문에 웃고 나서 결심이라도 한 듯 얼른 표정을 바꾸더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되기 전에… 아무리 힘들어도 재밌게 살아야겠어” 하며 웃었다.

“위녕이 이제 시험도 끝냈으니 뭐할 거니?”

막딸 아줌마가 내게 물었다.

“…으음 우선 좀 자구요. 책도 보구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살을 빼는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엄마가 “음, 아주 좋은 생각이야” 하고 대꾸했다.

“그런데 엄마…, 내 친구는 얼마 전에 17킬로나 뺐다.”

엄마와 막딸 아줌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엄청 날씬해졌는데 왜 그런지 우울증 걸렸어…. 아아, 우울증 걸려도 좋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 좀 빼봤으면 좋겠다. 나도 17킬로쯤 빼고 나면 생머리 길게 풀고 쫘악 달라붙는 가죽 바지에 부츠 신고 채찍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거야”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누나, 가죽 바지는 입어도 좋은데 채찍은 왜 들어?”

제제가 물었다. .

“왠지 멋있잖아.”

막딸 아줌마가 킥킥 웃었다.

그날 밤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 화장실에 가는데 엄마가 둥빈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잠긴 문을 쥔 채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야 날 발견하고 “너 거기서 뭐하니?” 하며 내가 할 질문을 하더니 소파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화장실에 갔다 나오니까 전화를 받는 엄마의 얼굴이 해쓱했다. 낮은 목소리로 “그래서? 그래서?”만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좀 바꿔주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거실로 가서 엄마 곁에 앉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빠 ….”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불렀다. 엄마의 입술이 엷게 뒤틀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위녕이 시험도 끝나고 밴쿠버에 있는 학회에 가겠다고 해놓았어요. 아니에요. 제가 취소할게요…. 그날이 수술 날이라면… 언니도 미국에 있고 오빠도 여기 없는데 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쪽에서 엄마가 아빠, 라고 부르는 외할아버지가 무언가 오래 말씀을 하셨다. 엄마의 눈에서 고였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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