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범법에 초법대응하는 외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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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주보따리 모시듯 소중히 간직하는 여권은 외국에서 국내의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다.
정부가『이 사람은 우리 국민이니 여행상의 편의를 봐주시오』하고 상대국에 부탁하는 증명서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여권을 발행하는 외무부가 법에도 없는「여권무효화 조치」를 무더기로 취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말썽이 되고 있다.
외무부는 도피성 출국을 한 경제사범 1백22명의 명단을 재외공관에 통보,여권무효 처리했으며 이들중 10명은 이미 귀국조치됐다. 요컨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여권을 받은 사람들의 여권효력을 없애 불법체류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같은 조치는 죄를 짓고 해외에 도피하다시피 나가 법의 심판을 교묘히 피하는 사례가 많은 현실에 비춰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현재의 여권법에는 이들에게 여권무효화 조치를 내릴 수있는 법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여권무효화 조치를 내리게 되면 자국민을 난민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여권무효화의 법제화를 미뤄왔었다.
외무부는『사법당국으로부터 이들 1백22명에 대한 여권상의 협조요청을 받아 여권무효화 조치를 내렸다』면서『범죄를 지었을 때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관련 법을 확대해석했다』고설명한다.
외무부는 뉘늦게 여권무효화 조치를 내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로 하고 형사상의 죄를 짓고 국내에서 기소중지된 사람이 일정기간 귀국하지 않을 경우 여권을 무효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여권법 개정안을 올가을 국회에 낼 예정이다.
그러니 외무부는 법이 통과되기 전에 소급(?)해서 이 법을 적용해 버린 기민성을 발휘한 셈이다.
이처럼 발빠른 외무부가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갖고 있는 金宗輝前靑瓦臺 외교안보수석,李源祚 前의원등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 형평성에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법당국으로부터 어떤 조치를 통보받아야 후속조치를 취하는데 이들의 경우 통보받은 사실이 없으며,특히 이들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
이들이 여권무효화조치를 당한 1백22명과 다른 점은 고위공직을 맡았었다는 것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무리 급해도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달라고 할 수 없듯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법을 집행해서도 안되고 그같은 정책이 일반시민과 권력자를 구별해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서도 안된다.
여권무효화 조치를 당한 사람들을 옹호하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은 공정하고 법적 뒷받침을 가져야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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